미래를 위한 장면(들)
이양헌
0.
“서기 2000년이 되면 모든 질병은 사라지고 가난은 과거의 기분 나쁜 기억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 또 모든 분야에서 놀라운 신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와 미래에는 반드시 이 모든 일들이 실현될 것이라 믿었다.”
-『인간은 미래를 어떻게 상상해왔는가』
1.
20세기의 첫 번째 사반세기는 아주 소란스러운 시간으로 기억된다. 일종의 거대한 실험실이자 베이스캠프로서 그곳은 위대한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자, 모더니스트들의 프로젝트로 가득 차 있었다, 가산(加算)의 역사와 기술적 진보,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은 만국의 사물들이 모여든 수정궁 안에서 투영되고 있었다. 이미 미래가 여기에 와 있다는 듯이.
2.
20세기가 거의 저물어가는 어느 해, “역사는 종말”이 선언되었다. 봉건제와 파시즘을 지나 동유럽을 지배했던 공산화 프로젝트의 파산을 목도한 사람들은 스스로 “인류 진화의 정점”이자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역사의 최종 단계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러한 ‘남겨진 시간’ 안에 살고 있는가. 세계를 변화시킬 대사건은 모두 소진되었고 미래에 대한 불신과 과거를 망각한 자들이 만연해 있다. 차라리 텅 비어있다고 해야 할 시간 없는 시간(들). 지루한 지속과 영원히 반복으로 특징 지워지는, 때때로 시지포 신화와 닮은 지금과 여기.
3.
일종의 현재주의라 불러야할 이러한 동시대적 시간관은 미래에 대한 강박을 해소시키는 듯하지만, 미래와 필연적으로 결탁해 있는 유토피아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냉소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반복과 순환, 폐허와 곤궁의 징후를 말하는 작업들이 근래에 자주 목격되고 있다. 그러므로 낮은 조도와 안개, 저화질 이미지, 기이한 시노그라피로 무대를 이루는 <나는 미래를 보았다>는 (그 제목을 소거한다면) 일편 당대적으로 보인다. 이곳은 낮은 노이즈와 이름 없는 신체들이 출몰하며 짙고 우울한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폐허의 감각을 떠올리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미래를 가장한, 현재주의를 위한 무언극은 아닌가.
4.
그러한 의심은 세 명의 협업자에 대해 질문으로 이어진다. 목우진은 최초의 텍스트를 발견했으므로 모든 것의 시작이자 텍스트 수집가, 오직 글말로 발화하는 절반의 예언가일 것이다. 그가 영사하는 텍스트는 사실상 언어이기 이전에 이미지라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해석 불가능성 자체를 점치고 있다. 반면, 신체를 다루는 서영주는 비언어적인 운동성을 다루지만 언어에 내재된 시간성을 새롭게 조형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반-예언가가 된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신성한 서사 구조를 모방하는 연극인 동시에 언어 구조를 신체로 다시 쓰려는 코레오그라피이기도 하다. 김성배의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무대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집주 아래 이 둘은 일종의 대칭을 이루면서 언어에 내재된 미래의 감각을 끝없이 탐문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영원회귀라는 거대한 순환 속에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5.
무대 전체를 비추는, 그리고 각각의 장면의 원천이 되는 염지희의 이미지는 잠시 소거했던 제목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미래를 보았다(I HAVE SEEN THE FUTURE)’ 그 자체로 시제와 의미가 어긋나는 문장이며 그로부터 이질적인 감각들이 출현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문장이 현재와 미래가 관계하는 특정한 속성을 표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시간과 사물, 장소에 기입된 일종의 ‘시대착오’는 “각각의 역사적 대상 안에서 모든 시간은 서로 조우하며 충돌하거나 유연하게 각자 서로의 바탕이 되고 서로 갈라지거나 얽힌다는” 잔존하는 시간의 감각과 공명한다. 그것은 이질적인 시간들의 몽타주, 일반적인 재현의 흐름을 찢는 ‘징후’를 그리는 염지희의 이전 작품들과 연동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인물과 사건, 배경이 서로 특정한 이야기로 겹치고 개별적인 비극으로 분리되면서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몽타주. 염지희가 형상화하는 시간의 이접과 비동시성은 분명 현재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그려내고 있는 듯 보인다.
6.
보다 구체적으로 염지희의 비선형적인 몽타주 혹은 그 요소가 되는 사진-이미지는 무대 안에서 어떤 미래를 그려내고 있는가? 그것은 우선, 영사를 통해 무대 전체를 비추며 이곳을 신체와 현전이 발흥하는 무대 이상의 장소로 만들어낸다. 연극과 대치되는 혹은 보충하는 것으로서의 시네마. 이러한 상영의 구조는 이곳을 중층적인 극장으로 재배치하면서 이질적인 시간성이 산출하는 미래와 그것이 현현할 무대의 조건을 구축해낸다. 거기에 더해 낮은 화소의 이미지들은 무대 전체로 투사되는데, 흐릿하게 유동하면서 과거의 것도, 현재나 미래의 것으로만 귀속되지 않는 정면성을 구현한다. 무대를 이루는 각각의 요소들(퍼포머, 사운드, 오브제)는 염지희의 몽타주이자 화면의 구성요소가 되면서 궁극적으로 진동하는 시간의 축들을 세워지고 무너트리는 장소를 이룬다.
7.
미래는 언제나 너무 늦은, 그리고 너무 이르게, 아직 아닌 것이자 이미 도래한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러한 비동시성들로만 그려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시간에 저항하고 이를 재배치하는 복수의 시간들 안에서 우리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가. 이 사건의 장소가 거대한 거울에 의해 반사되고, 어쩌면 그것의 이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관객은 이중 배치로 이루어진 객석에서 반사된 한 쌍의 공연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이제 선택의 문제로 전환된다. 두 개의 공연을 바라보는 두 개의 객석. 그 안에 놓은 셀 수 없는 비동시적인 시간의 축들.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수정궁이 다시 떠올려보라. 각각의 사물들은 각자의 미래를 비추고 있다. 어떤 미래를 결정할지는 가장 내밀한 믿음과 그것을 맹신해야만 하는 관객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거대한 수정궁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의 사물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 믿음과 미래가 어지럽게 뒤섞이며 다른 장면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 본 평론은 다원예술공연 '나는 미래를 보았다'(2018)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
나는 미래를 보았다 ㅣ I HAVE SEEN THE FUTURE ㅣ 2018.11.10 - 11.14 ㅣ 엘리펀트스페이스 ㅣ
기획,연출 : 염지희 ㅣ 사진, 영상 : 목진우 ㅣ 사운드 : 김성배, HEO ㅣ 퍼포먼스 : 서영주, 이원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