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Hysteria-To the Stage Of Drive


히스테리로부터 충동의 무대로

자크 라캉. “환상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그 무대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성’이란 언어화하지 못하는 ‘모순’에서 출발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출발점은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였다. 히스테리는 언어의 분열이다. 인간의 언어체계가 거짓과 발작을 동반하며 파열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끝내 히스테리 환자를 규정하지 못했다. 규정하지 못하는 구멍으로써의 주체는 곧, 하나의 주체를 정의하는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흥미롭게도 히스테리는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증상의 주체와 정의가 변화한다. 여성의 자궁이 일으키는 병에서 퇴역한 군인이 앓는 병으로, 언어화되지 못한 영역이 발작하는 ‘사회의 병’이 되었다.

인간의 모순은 히스테리처럼 언어와 언어 사이에 이중으로 구속되어 끼여 있거나, 충동처럼 언어를 무력화하거나 넘어선다. 개인은 언어를 습득하고 상상과 상징 사이를 구축하며 ‘나’라는 주어를 형성한다. 상상과 상징 사이의 구축과정에는 점점 틈이 쌓여 가는데, 쌓여가는 틈이 모순이라고 한다면 누적된 모순에 대한 대응이 곧 개인의 형상이 될 것이다.

나는 누적된 모순은 대부분 히스테리로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이중 구속에서 ‘사느냐, 죽느냐’를 선택한다. 나은 선택이 과연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히스테리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환상은 히스테리가 만들어 놓은 게임의 무대이다. 무엇을 선택해도 우리는 히스테리의 무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충동은 어떠한가. 충동은 언어를 넘어서거나 언어의 이전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인간성의 존립은 항상 언어의 무대 내부를 전제로 한다. 언어의 무대에서 저항하는 방법은 무대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무대를 존립하면서도 무대가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것. 실재의 일부를 가로막거나 제한하는 장치인 무대는 언어의 무대를 닮았다. 무대는 그에 걸 맞는 이야기를 생산하거나, 혹은 이야기를 위한 무대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무대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대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무대의 뒤편을 상기시키거나, 혹은 동시에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 무대에서 ‘나’ 스스로를 연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