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망각의 땅 위에서는 모두가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1)



이슬비 (미학관 디렉터)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시간인가, 죽음인가, 아니면 시작인가? 혹은 기원일까. 최초의 인간의 탄생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일곱 번째 하늘에 대해서? 혹은 발렌틴에 대해서?

   글의 첫 마디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한참 동안 염지희의 작업을 들여다본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그의 작업에서, 이번 전시에서, 첫 번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염지희의 새 시리즈에는 대략 세 개의 층위가 겹쳐져 있다. 최초의 인간, 일곱 번째 하늘, 그리고 발렌틴. 그것들 중 무엇 하나 ‘첫 번째’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작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낸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프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2)와 그로 말미암아 죽기 직전 축복을 내리기 위해 장남을 데려오라는 이삭의 말에 아내 리브가가 속임수를 써서 평소 더 아꼈던 차남 야곱을 이삭 앞에 앞세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장남인 에서를 대신하여 이삭의 축복을 받지 않았던가.3) 이처럼이 글에서 시작, 처음, 기원, 첫 번째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언제든 그것이 쉽게 뒤바뀔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글을 시작하겠다.


   최초의 인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볼까?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사후 출간된 소설 『최초의 인간』(Le Premier Homme, 1994)은 주인공 자크 코르므리가 죽은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염지희가 이번 작업 시리즈에서 많은 부분 빚지고 있는 까뮈의 이 소설은 그의 유작이자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까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지게 된 순간에도, 그의 가방 속에는 144장의 『최초의 인간』 초고가 담겨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하던 소설이자 그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완성되지 못하고 끝난 장편 소설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되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아버지 없이 자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크 코르므리 역시 전쟁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묘소에 도착했을 때, 묘비에 적힌 생몰연도를 보면서 지금의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신 또한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유산 없는 삶이란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의 실존적 운명이지만, 홀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는 극단적 고독을 의미한다. 이른바 ‘존재론적 고아’ 상태의 최초의 인간.

   그런데 최초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는 누구인가? 신이 처음으로 만든 인간일까,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게 된 첫 번째 인간일까. ‘최초’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무엇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그 대상 이전에 어떤 존재가 선행하고 있다는 뜻일테니, 최초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최초는 사후적으로 정립될 수밖에 없다. 까뮈에게 ‘최초의 인간’은 앞서 말했든 존재론적 고아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선형적 시간의 순서에 따른 처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역사적 단절로부터 기원을 잃은 자가 스스로 근원이 되어야 하는 상태, 다시 말해 고독한 실존의 형태를 드러낸다. 까뮈는 최초를 망각 위에 세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 최초의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염지희의 작업은 어떤가.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 뿌리를 알 수 없는 잘린 자작 나무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거꾸로 매달린 사람, 아치형 건물의 구조와 떼를 지어 날아가는 까마귀들. 어둡고 침침한, 불길하고 음산한 이 작업들은 죽음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뒤섞인 시간을 이야기하는가? 사실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든 상관없다. 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새까만 바닥 위에는 무엇을 먼저 두어도 그 순서는 곧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염지희가 작업을 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콜라주’라는, 단순히 오리고 붙이며 형태를 만들어가는 이 행위에는 고정된 서열이나 순서가 없다. 다만 먼저 붙이고 나중에 붙인 것들의 미세한 ‘겹침’만 있을 뿐이다. 사실 그마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작업에서는 소위 말해 숙련된 작가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필치의 고유성도, 독특한 색감이나 붓질의 습관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질감의, 다른 세대의, 다른 시간대의, 다른 매체의 파편들을 임의로 오려붙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콜라주라는 방식 자체가 생산자의 고유성(originality)을 제거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식이 염지희라는 작가의 고유성을 대변한다. 연필과 콩테, 목탄으로 가득 채운 화면 위에 전후 사진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흑백 사진 조각들이 더해지면서 비로소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된 이 작업들은 부서진 사진 조각을 긁어모아 정교하게 구성된 시퀀스를 연출하기에 이른다. 콜라주가, 특히 염지희가 즐겨하는 사진 콜라주가 특성상 여러 시간대를 한 화면에 옮겨 놓을 수 있는 것은 콜라주라는 기법이 지닌 특성이지만, 염지희의 콜라주 회화가 독특한 이유는 그 뿐만은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겹쳐 보이는 것들을 찾아보자. 시간인가, 죽음인가, 아니면 시작인가? 혹은 기원일까.


   염지희는 새까만 바탕 위에 사진만 콜라주 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 철학, 오래된 시의 일부를 가져와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나 보일 수 있도록 문구를 삽입하기도 하고, 작업의 소재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들춰보는 많은 책들 속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이나 문장, 인물을 소환하기도 한다. 제발트(W. G. Sebald)의 소설이나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글, 라이너 쿤체(Reiner Kunze)의 시구, 중세 시대의 종교화 등이 그렇다. 이번 시리즈 역시 까뮈의 최초의 인간을 비롯하여 일곱 번째 하늘, 미라지(Mi'raj) 등이 있다. 그는 소설 속 장면을 시각화하기도 하고, 문맥을 생략한 채 특정 문장 그 자체에 주목하여 그것을 일련의 시리즈로 구성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집된 텍스트와 모든 서사는 파편화되어 염지희라는 까만 바탕 위에 콜라주되고, 이질적인 조각들이 뒤섞이며 새로운 장면으로 재탄생한다. 콜라주는 여러 시간대를 한 화면에 옮겨 놓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 안에서의 시간성은 비정형일 수밖에 없다. 과거 사진을 스크랩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죽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서 최초의 인간은 익명적 존재로 매번 새롭게 등장한다.


   그럼 이제 발렌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가 도끼를 무대를 부숴버린 이후를 상상해보라. 그는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의 주인공 트루먼처럼, 거짓으로 뒤덮인 세계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중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것들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것을 부숴버리기로 결심한다. 이를테면 매번 같은 시간 출근길에서 똑같은 사람들을 마주한다든가 혹은 아내가 말다툼 중에 갑자기 제품을 홍보한다든가, 마치 자신만 모르는 비밀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처럼 거짓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트루먼처럼 말이다. 발렌틴은 트루먼과 같이 거짓된 세계에서 벗어난 최초의 인간이다. 혹은 거짓된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초의 인간.

   그리고 동명의 발렌틴이 있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코미디언인 칼 발렌틴(Karl Valentin)은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동료이자 그의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 이론에 많은 영감을 준 인물로서, 자신의 공연에서 무대의 세트나 집기들을 부수거나 파괴하면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두기를 불가능하게 만든 인물이다. 독일의 찰리 채플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카바레 공연부터 무성영화까지 그는 500편이 넘는 시나리오를 남겼다. 연극 무대의 생생함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 서사의 몰입감을 강조하여 극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관객에게 그로 하여금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 고전적 연극의 주요 장치였다면, 소격효과 혹은 소외효과라고 불리는 브레히트의 이론은 관객이 무대에 몰입하는 순간에 그것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의도적으로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렌틴의 도끼는 무대를 부수고 나와 현실과 연극 무대 사이의 간극을 삭제하는 역할을 한다.

   무대를 부수고 나온 발렌틴. 그는 가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없애버렸지만 그의 가상 세계 역시 현실 위에 지어진 것이었으리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발렌틴이란 인물이 실존했는지에 대해서는 어쩐지 의문이 든다. 이미 ‘칼 발렌틴’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발렌틴이라는 인물로 전도되었기 때문에, 그가 누구였으며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넘어가도록 하자. 처음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이 전시는 부서진 무대 위에 다시 세워졌다.


   이 전시는 염지희의 지난 개인전 《녹투라마 : 발렌틴의 도끼》(2025, 인천아트플랫폼)와 짝패를 이룬다. 지난 전시의 시퀄(sequel)이자 프리퀄(prequel)인 이 이야기는 이전 전시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했던 녹투라마4)의 배경을 드러낸다. 칠흑 같은 밤하늘인가, 울렁이는 밤바다인가. 녹투라마의 미지의 아름다움과 혼란이 공존하는 풍경이 넓게 펼쳐진다. 일곱 개의 풍경 연작은 은연중에 다음의 두 가지를 지시하고 있다. 하나는 무함마드가 승천하여 계시를 받기 전 거쳤던 밤의 여정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성전산에서 하늘로 솟아올라 일곱 명의 선지자들을 만나게 되는 각각의 천계이다. 무함마드는 첫 번째 하늘에서는 아담을, 두 번째 하늘에서는 예수, 이어 그 다음에는 요한, 요셉, 에녹, 아론, 모세를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일곱번째 하늘, 풍경은 수평으로 늘어서고 천사는 수직으로 상승한다.

   이 선지자들은 모두 죽었다. 이미 죽었고, 무함마드도 죽었다. 신학의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 이전에, 허구와 사실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시작이 불분명한 그 어떤 지점으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인용되면서 살아온 글들은 염지희의 작업에서 다시 한 번 시각성을 획득한다. 오래된 사진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익명성을 바탕으로, 어둡고 칙칙한, 다소 불길한 이미지의 콜라주 안에서 본래의 시간과 의도와 주체를 잊어버리고 염지희라는 바탕 위에 콜라주 된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 안에서 다시 태어난 최초의 인간(들).





1) 국내 번역본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알베르 까뮈, 『최초의 인간』, 김화영 옮김, 열린 책들, 2026. 203쪽,)

2) 창세기 25:31

3) 창세기 27:23

4) 야행성 동물원. W.G. 제발트의 소설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2001)에 등장하는 안트베르펜 동물원.




* 본 글은 염지희 개인전 《미라지 : 일곱번째 하늘》(미학관, 2026.7.3~7.26)의 전시 평론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름답게 캄캄해졌다1)

 

 

이영리 (인천아트플랫폼 운영팀장, 큐레이터)

 

 

 


이 조각을 깎은 이, 아마 

즐거웠으리, 확신이 그 손을 이끌었을테니

죽은자들 가운데서 깨워지리라는 확신2) 

 - 라이너 쿤체

 

 

“시는 삶이라는 연극의 유일한 대본”3)

인천아트플랫폼이 기획·운영하는 ‘인천미술 올해의 작가’ 2024년 선정자인 염지희는 ‘콜라주’를 주요 조형 언어로 사용한다. 캔버스에 전후 시대 흑백 사진 아카이브에서 선별한 이미지를 잘라 붙이고, 연필, 목탄, 석채를 이용한 드로잉을 더해 화면을 완성한다. 작업의 주제나 내용은 문학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고 한다. 염지희 작가는 특히 시를 ‘삶이라는 연극의 유일한 대본’이라고 하면서 영감의 원천으로서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들이 서정적이면서 때로 기이하고, 명료하기보다는 모호하며, 두려운 감정을 야기하는 동시에 환상적이고, 많은 상징물로 인해 매우 의미심장한 것은 시와 그 특성을 공유한다. 이러한 그의 작품을 문학의 수사법으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용과 인유 

‘2024 인천미술의 올해의 작가’ 전시를 위해 염지희 작가는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라는 제목의 평면 연작 60여점을 제작하였고, 같은 제목의 전시가 2025.3.6.부터 5.18.까지 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1에서 개최되었다. 전시와 작품 제목에서부터 ‘인용(引用, quotation)’ 기법이 사용된다. ‘녹투라마’(야행성 동물원)는 W.G. 제발트의 소설 『아우스터리츠』(을유문화사, 2009)에서, 발렌틴의 도끼는 독일의 희극배우 칼 발렌틴(Karl Valentin, 1882-1948)과 그의 공연 소품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외에도 작가가 영감을 받은 시인 라이너 쿤체와 울라브 하우게의 싯구는 고대 신전의 인스크립션처럼 작품 내 곳곳에 직접 인용되었다. 중세 종교화나 제단화에서 볼 수 있는 삼면화 양식이나 건축 구조물도 보인다. 또한 작가가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연금술서의 도판에서는 문자 띠와 같은 장식적 요소들을 가져왔다. 

 

‘인용’은 단순히 끌어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인용된 부분은 새로운 작품의 새로운 맥락에 놓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됨으로써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풍성하게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품에 권위를 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원작을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인용한 작품과 인용된 작품 간에는 상호 호응 즉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발생하며 예술의 지평을 확장한다.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20(부분)>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5(부분)>


 

L.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1>, 2024, 천 위에 콜라주, 연필, 목탄, 석채, 112.1×112.1cm

R. 장 벨감브 Jean Bellegambe_<마르시엔느의 삼위일체 삼면화 Triptyque de la Trinité de Marchiennes>_108×129cm_나무        패널 위에 유화 oil on wood panel_1513-18_릴 미술관(Palais des Beaux-Arts de Lille) 소장

                        

 

L.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30>, 2025, 천 위에 콜라주, 연필, 목탄, 석채, 53×33.4cm

R. 『연금술 현자의 돌』(시공 디스커버리 77, 안드레아 아로마티코 지음, 성기완 옮김, 시공사 출간, 1998), p.43에서 발췌

    

한편, 인용보다 한층 더 간접적이고 우회적이며 암시적이어서 보는 사람(읽는 사람)의 배경 지식을 요하는 ‘인유(引喩, Allusion)’도 찾을 수 있다. ‘끌어와서 비유한다’는 한자어 뜻을 가진 ‘인유’는 역사적, 문화적 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람, 장소, 사물 또는 아이디어에 대한 간단하고 간접적인 언급이나 암시를 말한다. 인유를 사용할 때 작가는 언급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데, 이는 독자가 텍스트에서 암시를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인유는 수수께끼나 퀴즈를 풀었을 때의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유희적 작동을 가능케 한다. 살짝 암시만 해도 ‘척하면 척’하고 알아볼 수 있으려면 어떤 내용을 언급한(인용한) 사람과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 간의 공통된 배경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관람객은 염지희 작가의 작품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흔적을 찾아내고, 작가가 어릴 적 수도 없이 보았다는 그림책의 한 장면이 참조된 작품을 알아보고는, 그리고 전시장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시집과 싯구가 염지희 작가의 레퍼런스로 소개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매우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것에 대해 작가와 관람객 간에 공동체 의식, 동질감 같은 우호적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염지희 작가는 인유법을 통해 관람객을 같은 편으로 더욱 가깝게 끌어들인다.


     

L.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5(부분)>   

R. 염지희 작가 소장 그림책 『무지개의 전설』(울 데 리코 지음, 백우영 옮김, 문선사, 1984) p.23에서 발췌


 

L.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40>, 2025, 천 위에 콜라주, 연필, 목탄, 석채, 30×30cm4)

R.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5(부분)> 4)                  


 

L.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43>, 2025, 천 위에 콜라주, 연필, 목탄, 석채, 27.5×27.5cm

R.『연금술 현자의 돌』(시공 디스커버리 77, 안드레아 아로마티코 지음, 성기완 옮김, 시공사 출간, 1998), p.19에서 발췌    



콜라주와 데페이즈망, 운하임리히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50(부분)>,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21(부분)>,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29(부분)>


콜라주 혹은 포토몽타주 기법을 사용하는 염지희의 작품들은 다분히 초현실주의적이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나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 시인 이상(1910-1937)의 계보를 잇는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는 콜라주와 포토몽타주를 활용하는 한 필연적이라 할 수 있는데, 출처가 다르고 성격과 용도가 상이한 이미지들을 본래의 맥락에서 잘라내어 새로운 장면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효과는 데페이즈망이나 언캐니로 번역되는 운하임리히로 설명할 수 있다. 

 

프랑스어 데페이즈망(dépaysement)에서 페이(pays)는 ‘나라’라는 뜻이다. 반대를 나타내는 접두어 dé가 붙어 ‘나라나 정든 고장을 벗어남’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초현실주의에서는 이 단어를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낸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데페이즈망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Lautréamont, 1846-1870)의 유명한 시구절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이 회자된다. 즉 낯익은 물체가 그것이 놓여있는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에서 떼내어져 뜻하지 않는 장소에 놓임으로써 발생하는 의외성과 놀라움, 심리적 충격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프랑스어에서는 이런 기법과 효과를 ‘나라를 떠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면 독일어에서는 ‘집’을 떠나는 것으로 표현한다. 영어의 언캐니(Uncanny)를 상응어로하는 ‘운하임리히(Unheimlich)’는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개념이다. 어근이 되는 하임(heim)은 ‘집’, ‘안락함’, ‘편안함’이라는 뜻으로 여기에 un을 붙임으로써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난 낯설음과 그로 인한 불편함, 기이함, 걱정스러움을 나타낸다. 

 

염지희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들의 동작, 의상(고깔, 하녀복, 수사복, 운동복), 동물의 사체나 뼈, 뿔 달인 동물과 새, 숲과 나무, 중세 건축물은 일견 꿈에서나 볼 듯 일관성이 없고 조화롭기보다는 ‘해부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만큼이나 의문스럽다. 하지만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경이로움과 의외의 미적 체험을 제공한다. 매끄러운 서사 구조와는 거리가 있는 불길한 기운과 환상적인 분위기는 관람객의 인지 체계를 더욱 활성화시킨다. 

 


콜라주와 소격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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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3>, 2024, 천 위에 콜라주, 연필, 목탄, 석채, 112.1×112.1cm


한편, 콜라주 기법은 잘라 붙여진 등장인물이 작가가 구성해 놓은 장면과 겉돌게 하고 관람객 역시 그 안으로 깊숙이 몰입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제어장치로 작동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주창한 ‘소격 효과(Verfremdung, Alienation Effect)’가 발생하는 것인데, 평면 작품에 콜라주 된 부분의 종이 두께와 질감만큼 미묘하지만 확연하게 나타난다. 잘라 붙여져 목탄과 석채로 표현된 배경으로부터 도드라져 보이는 인물들, 동물들, 사물들은 관람객의 전적인 감정이입과 감정동화, 몰입을 견제한다. 오히려 이것이 만들어지고 연출된 장면임을 자각하게 한다.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꾸는 꿈, 자각몽(lucid dream)처럼.

 


콜라주와 연금술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염지희 작가가 참조하는 연금술과도 닿아 있다. 연금술은 실험에 기반한 과학인 동시에 영성을 추구하는 미신이다. 천문학이라는 학문의 지위와 함께 점성술이라는 오컬트 계보를 따른다. 연금술은 선형적 세계가 아닌 순환의 세계이다. 연금술을 설명하는 도식과 도판은 수많은 상징물로 어렵게 서술되어 있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숙고해야 한다. 은폐함으로써 신비감을 강화시키고 비밀스런 상징들로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염지희 작품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우주는 근본적으로 분석하자면 어려움과 평이함, 모호함과 명료함이 뒤섞인 패러독스 그 자체”5)라고 말하는 연금술사의 말은 염지희의 작품들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놓는 사람(metteur), 염지희

2024 인천미술의 올해의 작가 염지희의 개인전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2025.3.6.-5.18., 인천아트플랫폼)는 미장센(mise-en-scène)’이 돋보이는 전시였다. 작가는 회화 작품을 흰 벽에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춰 일렬로 진열하는 통상적인 디스플레이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전시 공간이 하나의 큰 작품이 되도록, 그곳에 걸린 회화, 영상, 설치 작업은 큰 작업을 이루는 개개의 요소로 기능하도록 공간 구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통상 ‘연출’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미장센’은 ‘무대 위에서의 등장인물의 배치나 역할, 무대 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며, 프랑스어 동사구 ‘mettre en scène(장면(무대)에 놓다)’라는 표현의 명사형이다. 즉 미장센을 직역하면 ‘장면(무대)에 놓음’이다. 그리고 연출가는 ‘장면(무대)에 놓는 사람(metteur en scène)’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연출가’ 즉 ‘장면(무대)에 놓는 사람’이라는 명칭은 염지희 작가의 역할을 규정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작품 하나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고, 즉 다른 곳에서 잘라낸 사진 이미지들을 캔버스에 이리저리 배치하고 인물들이 들어갈 공간이 만들어지도록 단과 벽을 세워 작품 속 공간을 구성하였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이 작품들을 전시 공간에 어떻게 ‘놓을지’ 공간 디자인에 고심하였다. 그렇게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더 큰 장면으로 만들어내고, 더 큰 무대로 구성해 내었다.6) 회화, 영상, 설치 작품, 아치 구조, 계단, 난간대, 테이블, 커튼, 카펫, 무빙 조명에 특별히 제작한 향수까지 총체적인 연출로 전시장을 야행성 동물들이 머무는 동물원 ‘녹투라마’로 구성함과 동시에, 발렌틴이라는 광대가 부숴버림으로써 새롭게 구축하고자 꿈꾸었던 이상의 무대를 구현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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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투라마: 성스러운 대화>, 2025, 천 위에 연필, 목탄, 석채, 

나무 패널 배접, 400×200×4cm

묘실은 저 혼자 곰팡이 슬고  

묘석들은 기울어 서있다  

그 스러짐이 돌 되었다7) 

- 라이너 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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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나는 카펫에 앉을거야

그리고 멀리 항해를 나갈거야

다른 세계로8) 

- 울라브 하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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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옳아 좋은 시는

차향이 나야해.

아니면 숲의 땅이나 

갓 자른 나무 냄새가9) 

- 울라브 하우게




짓는 사람, 염지희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2>, 2024, 천 위에 콜라주, 

연필, 목탄, 석채, 112.1×162.2cm



시작(詩作)에는   

내가 좋아하는 게 있어요 

아주 잠시  

시 속에서 

집을 갖는 것 같아요10

- 울라브 하우게

   


    

이렇게 공간을 만들어내고 연출하는 염지희 작가의 역량과 관심사는 작가가 선호하는 문학 작품의 형식과도 궤를 함께한다. 염지희 작가는 말하기를, 전시에 참조한 W.G. 제발트의 소설 『아우스터리츠』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서사 구조보다 오히려 소설 속에서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서술되는 과정이 더욱 흥미로웠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 작가는 시를 짓듯이 평면의 회화 속에서조차 공간을 짓는다. 

 

우리말에서 ‘짓는다’는 동사가 얼마나 중요한 인간의 행위를 서술하고 있는가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밥을 지어먹고, 옷을 지어입고, 집을 짓고 산다. 그리고 글을, 시를 짓는다. 인간 생존의 필수 요소인 의식주와 더불어 문학이, 예술이 같은 단어로 기표화된다는 것이 우연일까. 시가, 문학이, 예술이 결코 인간의 잉여 활동이 아니라 의식주만큼이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어떤 것이라는 의식을 우리는 이미 내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지희 작가의 작품을 보며 곱씹어 보게 된다. 

 


작품을 완성하는 관람객

모더니즘 이후 관람객은 단순한 감상자에서 작품의 완성에 관여하고 개입하는 적극적인 수행자가 되었다.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전시를 찾은 관람객 역시 작품 앞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작가는 관람객을 호명하고 초대한다. 상징을 파헤치는 기호학자, 비석의 비문을 해석하는 고고학자, 꿈을 풀이하는 해몽가 혹은 정신분석학자, 스토리보드를 짜는 시나리오 작가에서 가볍게는 산책가, 방랑자(wanderer, flâneur)가 되도록. 그리고 관람객은 이에 기꺼이 응하는 식이다. 그렇게 관람객은 녹투라마 무대에 오른 연극배우가 되어 작품 속에, 전시장 안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건져올림으로써 무대와 극을 완성한다. 관람객으로 말미암아 개개의 작품들은 발렌틴의 도끼처럼 반짝 빛을 발하며 번뜩이고, 작가가 정성스럽게 지은 전시 공간은 “그리하여 아름답게 캄캄해진다.”

 



1) 라이너 쿤체의 시 「예술의 끝」 중에서, 『은엉겅퀴』(전영애, 박세인 옮김, 봄날의 책, 2022) p.53, 본고에서 인용한 모든 싯구는 염지희 작가가 작업의 레페런스로 제시한 시집들에서 발췌하였다.

2) 라이너 쿤체의 시 「영원한 삶이 있다는 강변」 중에서, 『나와 마주하는 시간』(전영애, 박세인 옮김, 봄날의 책, 2019) p.27

3) Btv 인천뉴스와의 인터뷰 中 영상링크: https://news.skbroadband.com/news/articleView.html?idxno=179486

4) 각각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피레네의 성 The Castle of the Pyrenees 1959>, <백지 위임장 The Blank Signature 1965>과 비교해 보면 좋다. Comparing this work to Magritte’s The Castle of the Pyrenees (1959) and The Blank Signature(1965) is recommended.

5) 『연금술 현자의 돌』(시공 디스커버리 77, 안드레아 아로마티코 지음, 성기완 옮김, 시공사 출간, 1998), p.123

6)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전시의 공간 구성과 디자인의 구체적인 부분들은 조경재 작가와의 협업의 산물이다. 염지희 작가가 장면에 어떤 것을 놓을지 결정하는 연출가라면 조경재 작가는 연출가의 의도대로 구체적인 장면을 그려낸(써낸) 시노그래퍼(Scenographer)의 역할을 담당했다.

7) 라이너 쿤체의 시 「체르니브치」 중에서, 『나와 마주하는 시간』(전영애, 박세인 옮김, 봄날의 책, 2019) p.45

8) 울라브 하우게의 시 「카펫」 중에서,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임선기 번역, 봄날의 책, 2017) p.17

9) 울라브 하우게의 시 「나는 시를 세 편 갖고 있네」 중에서,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임선기 번역, 봄날의 책, 2017) p.35

10) 울라브 하우게의 시 「나뭇잎집과 눈집」 중에서,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임선기 번역, 봄날의 책, 2017) p.39




*본 비평은 2025 인천아트플랫폼 기획전시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Nocturama: Valentin's Ax》 도록에 수록된 글 입니다.

녹투라마 : 발렌틴의 도끼 온라인 도록

콜라주-회화-시가 작동하는 심연의 무대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나는 엮고 나는 풀어낸다 나는 주고 나는 거부한다

나는 창조하고 나는 무너뜨린다 나는 숭배하고 나는 처벌한다

생각은 나의 꽃 나는 어루만지고 나는 씨앗을 뿌린다

나는 내 손가락으로 본다 나는 만지고 나는 이해한다.1) 

 

나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영역에 무엇이 채워져 있는지 상상해 본다. 나의 마음이 어떤지 그려보려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들이 나열될지 다시 시도해 본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지는 이 모두는 어디에 저장되는지, 기억은 왜 끝없이 변주되고 사라지는지, 그럼에도 끝까지 남는 기억이 있는 연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의식은 무엇이고, 무의식은 무엇인가? 상상과 연상은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는가? 인간의 욕망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세상은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신비로운 것투성이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의 내면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고 느낌에도 정확히 특정하기 어려운 무언가이다.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연구들, 철학, 종교, 그리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사유와 고심의 결과들을 붙잡아봐도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내 작은 뇌에, 육신(의 작용)에 어찌 이렇게 많은 것들이 머무르고 스쳐 가는지 버거울 때도 있다. 암흑과도 같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할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존재하는 것 같다. 평생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부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원초적이지만 논리적이고, 즉흥적이지만 치밀하며, 흐릿하지만 선명한 내 안의 세계는 공고하게 구축되는 만큼 연약하다. 그러나 넓고 넓어서 규범화되거나 파편화되는 언어와 이미지 모두를 품는다. 불현듯 스쳐 가는 단상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무언가, 심지어 잠이 들면 마주하는 꿈도 예외는 아니다. 무의식적 욕구나 상징의 종합, 어느 것이든 꿈은 깊은 연못에 가깝다. 꿈은 기억만큼 망각의 손을 잡는다. 논리적인 듯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인데 서사적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세계-무대가 펼쳐지고 영화처럼 이야기의 구조를 가질 때도 있다. 그러고 보니 꿈만큼 나-그대를 잘 나타내는 것도 없다. “그대들의 꿈이야말로 바로 그대들의 작품이다!” 배우와 관객, 소재와 형식, 지속 정도까지 “이 모든 것이 그대들 자신이다!”2) 특히 꿈은 비현실적이지만 행복한 형상들만 주지는 않기에 깨어 있는 세상과 닮았다. 우울하고, 암담하고, 슬픈 것, 불안한 기대처럼 “삶의 ‘신곡(神曲)’ 전체가 지옥편과 함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꿈이다.3) 


염지희는 작업 초기부터 자신의 밖보다는 안-내면에 집중해 왔다. 단절이나 고립은 아니다. 안과 밖은 서로를 담아내며 상호작용한다. 내면은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세상은 나-개인들의 내면을 형성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에 흰빛과 검은빛이 드리워졌고, 그럴수록 더 깊은 심연으로 파고들었다.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움에도, 아니, 어려워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내면에는 내가 밖으로부터 흡수한 것들이 자기화된 채 머무른다. 세상을 향해 눈을 뜨는 순간부터 나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망각조차 선택적이다. 인간은 이성적이라고 말하지만, 예상-기대보다 훨씬 더 자주 논리적 비약에 빠진다. 그래서 밖보다는 안이다. 마치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묘하고 낯선 조합의 인간, 동물과 식물, 사물들처럼 나-개인의 내면은 다층적이고, 복잡하며, 협화음만큼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이에 작가는 자신의 안과 밖, 그리고 그 경계를 보여줄 수 있는 통로로 무대와 같은 시공간을 떠올렸다. 영화의 세트장이나 연극의 무대, 시나리오는 사실과 허구, 실제-실재와 가상을 넘나드는 오묘한 세상이자, 내면을 쏟아낼 수 있는 장소였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하나의 무대만 있지 않기에, 또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살고 있기에 서로 다른 삶(들)의 무대들이 포개어질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리고 화폭에서도 낯선 시공간의 겹침은 끝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의 내면은 홀로 형성될 수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는 필수적이다. 의식과 무의식 모두에서 나만큼 우리가 존재한다. “내면과 심연으로 파고들수록 우리는 종종 집단 무의식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 무엇으로 더욱 연결되는 느낌이다.” 각자만의 세계에서 자기의 배역에 몰두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화폭 위에 공존하는 인물들이다.4) 


한편 뒤돌아 있거나, 무언가로 얼굴을 가리고 있거나, 일부 혹은 전체가 삭제되어 정체성의 상징과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등장인물들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과 당신-타인을 탐험-탐구하는 작가의 쉽지 않은 여정을 암시한다. 구체화하지 않은 얼굴은 규범과 전통을 근거로 가해지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억압 때문에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는-잃어가는 주체를 암시한다. 무엇보다 끝없이 생성되는 의미의 가능성을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림은 한정 짓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일반적인 영화나 연극이 보여주는 직선적인 서사가 아니라 “모든 서사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듯한 모습”, 입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 사건들의 인과 관계를 나중에 알게 되는 복잡한 상황들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콜라주5)는 영상 영화와 회화를 전공한 염지희의 이력과도 긴밀하다. 영상 촬영을 위한 스토리보드를 만들 때 사용되는 콜라주는 작가-나와 그대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서사-이미지들의 조합과 해체 그리고 재조합을 표현하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콜라주를 위한 재료로 1950~1960년대의 기록 사진을 선택한 것 역시 서로 다른 맥락에 위치하던 낯선 시공간의 결합을 강조하는 데에 일조했다. 마치 유령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사진 조각-파편들은 비현실적인 몽롱함을 전한다. “사진 이미지가 이토록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미지에서 우리에게 이따금 불어오는 고유의 피안성 때문이다.”6) 작가는 예상하지 못한 이미지들의 이질적인 결합을 통해 “서로 다른 명암”을 가진 존재들이 각자의 욕망과 충동을 따라 살아가고, “미세한 어긋남”을 만들고 있음을 시각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콜라주 회화”는 시작되었다.7)―<콤플렉스 판타지(Complex Fantasy)>(2009~2010), <히스테리로부터 충동의 무대로(From Hysteria To The Stage of Drive)>(2011~2014)― 


이후 선보인 <냉담의 시(Poesie Del Disamore)>(2015~2018)에서는 삶과 대척점에 있는 것 같으나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죽음에 천착했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의 시는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 사이의 헤어짐과 이어짐,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사유,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집중하게 했다. 무엇보다 생과 사를 마주하는 나-개인들의 내면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염지희의 작품에는 “시적” 언어와 이미지의 비중이 커졌다.―실제로 작품의 제목에는 파베세의 시구가 적혔다.― 작가는 이미지로 적어 내리는 보는 시를 상상했다.8) 형상들은 시어가 된다. 시어는 나풀거리며 춤을 춘다. 바람결에 흩날린다. 무언가와 손을 잡는다. 이미지로 쓴 서사시일 수도, 서정시일 수도 있다. 극시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어쩌면 완결되지 않은-못한 시어들의 흩어짐이 불러오는 가능성이 콜라주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작가의 관심은 인간이 의식할 수 없는 내면인, 깊은 바닷속의 보물선 같은 무의식과 그것의 발로로 여겨지는 꿈으로 이어진다.―<장식적인 은둔자: “이런 꿈을 꾸었다”(The Ornament Hermit: “I Dreamed Of This”)>(2019~2023)― 꿈이라는 시어는 다재다능하여 인간의 삶을 아우른다. 낮과 밤, 의식과 무의식, 이상-희망, 행복한 분위기, 헛된 바람, 절망이 모두 그 안에 머문다. 꿈이 욕망의 발현인지, 상징인지 곰곰이 탐색해 본다. 작가가 스스로에게 깊이 들어갈수록 화폭에 홀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그려지는 비중이 커졌다. 그리고 정신, 영혼, 마음, 무의식, 꿈, 슬픔, 절망, 또 다른 무언가도 될 수 있는 검은 안개 같은 대기-구름 덩어리가 존재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무대 위의 배우-무용수처럼 조금은 과장된, 그러나 유려한 동작의 인물들은 심연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인지 이제는 나오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그런데, 그래서 아름답다. 미묘한 공포감과 아름다움이 손을 잡고 있어서인지 더 매혹적이다. “인간은 꿈의 세계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예술가이다.” 아름다운 가상인 꿈은 “모든 조형예술의 전제”이고 서사시의 전제 조건이다. “예술적으로 예민한 감각을 갖는 사람은 철학자가 실제의 현실을 대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꿈의 현실을 대한다.” 꿈속에서는 모든 형태가 말을 걸어오고, 나-우리는 형상을 이해하고 즐긴다. 중요하지 않은 것도, 불필요한 것도 없는 게 꿈이다.9)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Nocturama, Valentin’s Ax)>(2024~2025)에서는 <장식적인 은둔자: “이런 꿈을 꾸었다”>의 특징들을 심화했다. ‘2024 인천 미술 올해의 작가 염지희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 작업 초기부터 영향을 받았던 연금술 그림, 종교화, 제단화의 형식적 응용이나 연극, 무용, 음악회의 무대를 보는 것 같은 화면 구성도 강화되었다. 그림 속에 주요 인물의 명칭, 주문, 성경, 신을 찬양하는 구절 등이 적혀 있는 데에 영감을 받아 같은 방식으로 라이너 쿤체(Reiner Kunze), 울라브 하우게(Olav H. Hauge)의 시를 삽입하고, 한 폭의 종교화에 성경의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서로 다른 시공간의―여러 내용이 동시에 그려져 있듯이 낯선 이미지들의 동시적 공존을 보여준 것이 대표적이다. 다만, 염지희는 무대를 세우는 동시에 심연을 이용해 해체하기를 반복한다. 삶-내면은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야행성 동물들이 머무르는 어둠의 동물원 녹투라마(Nocturama)는 새로운 방식의, 또 하나의 무대와 같다. 칼 발렌틴(Karl Valentin)은 도끼로 무대를 허물어뜨렸다. 작품이 풍기는 “미스터리도 스릴러도 아닌, 조금은 복고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도 더 짙어졌다. 작가는 오래전부터 늪 같은 심연과 함께 존재들 사이를 감싸는 호흡이자 공기, 영혼인 프네우마(pneuma)를 상상했다.10) 


검은빛과 어둠으로 가득 찬 전시장을 천천히 비추는 빛은 작품 안과 밖의 심연-검정을 더 깊고 진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염지희의 무대에 검정뿐 아니라 흰색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흰색과 검은색의 명암법이다.” 빛이 나를 향해 오는 순간을 기다리고 기대해 본다. 빛 자체는 색처럼 볼 수 없다. 물체의 표면에 머무는 색과 달리 빛은 공간 속을 흐른다. 그러나, 그래서 나-개인과 세상이 만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인간은 보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그리고 “흰색으로 나타나는 빛 속에서” 영으로 이끄는 무언가가 발견된다. 반면 검정은 어두움이기에 상실, 죽음, 혼돈, 우울의 정조를 품는다. 그러나 어둠의 밖에는 항상 빛이 기다리고 있다. 검정은 그저 절망이 아니다. 검정에는 모든 색이 있다. 연금술에서 검정은 흰색과 빨강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다른 색이 그렇듯 검정도 숯-목탄처럼 세계 속 무언가의 본질적 색이다. 또한 검은 물질인 납은 “현자의 금이 되는 근원”이고, 타르와 역청은 “현자의 돌”을 상징한다.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에 따르면, 색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영상”이다. 그것은 생명, 혼, 영, 죽음의 영상이다. 검정은 죽음의 영적 영상이고, 흰색 혹은 빛은 영의 혼적 영상이다. 그런데 어둠이 있어야 빛이 힘을 발휘한다. 검정을 지나야 시작이 열린다. 검정은 자연의 파괴와 재생 둘 다를 품는다. 식물이 검은 숯이 되면 생명이 떠나가고 인간의 혼은 어둠의 공포에 잡혀 정지하지만, 영은 피어난다. 검은색을 통해 영이 표현된다. 영은 검정 속에서 작용해 활동의 장을 얻는다. 하나의 화폭-공간에 “흑백의 예술(명암법)을 시도”하면 영이 흰 부분에 이입되고, 검정과 만날 때 흰빛은 신비롭고 영묘해진다. “영화(靈化)한다.”11) 


그러고 보니 작품 속 존재들은 부유하는 영혼이나 유령 혹은 판타즈마(Phantasma) 같다. 나무, 각종 동물과 형상들, 구름과 안개, 물결과 결합한 몽환적 존재들은 죽었으면서도 살아있는 듯하다. 환영과 환시를 불러오는 효과는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를 제공하는 <몽상 속의 장식적인 은둔자(The Ornament Hermit, in a Daydreams)>(2023)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유령들은 정답과 오답, 맞음과 틀림, 참과 거짓, 존재와 무, 심지어 가능성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잠재성의 불확실성, 환원할 수 없는 가상에 속한다.12) 


심도는 더 강화되었다. 작업을 위한 행위의 시간도 늘었다. 발굴하고 파묻기를 반복하는 시간이다. 화폭을 채워나갈수록 밤, 어두움, 암흑, 흐릿함이 밀려온다. 밝지 않은 빛이어서 자유롭다. 깊이 빠져들었기에 한결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어두워서 아름답다. 모호해서 미려하다. 미궁은 점차 모두를 잠식하고-가라앉히고 그만큼 신비로운 공포와 상상이 커진다. 새들은 만남인지 떠남인지, 날개를 단 존재들은 날아오르는지 내려앉는지,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남겨지는지 떠나가는지, 칠흑 같은 한밤인지 동이 트기 직전의 숨 막힐 듯 고요한 새벽의 검은빛인지 알 수 없다. 잠을 자는지 레테(Lethe)의 강을 건너는지 불확실하다. 여러 형태로 등장하는 나무들은 겨울을 지나 잎을 피울지, 죽은 나무로 남을지 안개 같다. 그러고 보니 전시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에 등장한, 그림이 그려진 가벽은 묘비를 닮았다. 하지만 문-통로 같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일지, 새로운 시작의 순간일지 곱씹어본다. 손에 쥔 천은 가볍고, 얼굴을 덮는 천은 무겁다. 일렁이는 검은 공간에 손을 넣으면 무엇이 딸려 나올지, 그 안에 빠지면 어디까지 가라앉을지 조심스러운 탐색을 시작할 때다. 작가는 그저 전시장 2층의 한가운데에 힌트를 조심스레 나열할 뿐이다. 여기에는 다음 작품-콜라주 회화의 재료가 될지도 모르는 오려진 사진 조각들, 석고 조각의 파편들, 작가가 여행지에서 우연히 구매한 화집, 손에서 놓지 못했던 책들, 작품에 등장하는 시구가 적힌 시집이 포함되었다. 물론 이것들이 길잡이가 될지, 혼란의 미로를 생성하는 데에 일조할지 예측할 수 없다. 상상-몽상-공상의 실타래를 푸는 것은 결국 나-개인들의 몫이다. 작가의 심연에 빠져들었던 사람들은 이내 자신의 심연으로 이동한다. 아스라한 빛이 비추는 그곳에 빠져든다. 


염두에 두긴 하지만, 작가가 형식적 실험을 최우선에 두고 흑백의 콜라주 회화를 지속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작으로 올수록 강조되는 화면 속 또 하나의 무대 혹은 프레임(frame) 역시 마찬가지이다.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시리즈 중 다수는 화폭 안에 또 하나의 화폭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려졌다. 전술했듯 작가가 연극 무대 혹은 제단화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회화적 공간-화면 분할의 실험을 언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각의 화폭이라는 무대-세상 안에 또 하나의 무대-세상을 펼쳐낸다는 점에서 극중극이나 액자소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중의 구조는 세상 안에 작가가 그렇게나 집중해 온 나-개인의 내면이라는 또 하나의 세상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현실의 물리적 시공간으로부터 두 번의 거리두기는 관조와 상상을 촉발한다. 광범위해 보일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상상적 활동은 환상적”이다. 그런데 환상적이란 단어는 모호하고 비실재적이다. 실재적인 것을 포함하면서도 부순다. 환상적인 것-무언가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유령처럼 존재와 무-없음 사이에 정지한다. 다만 환상은 실재하는 세계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환상은 실재를 재결합하고 전도하지만, 실재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13) 


전시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에서 작가는 분명 회화적 세계이자 무대―의 무대―를 현실의 시공간에 구현하는 데에 집중했다. 흠뻑 빠질 수밖에 없는 매혹적인 정경을 펼쳐내는 전시장은 빛과 어둠, 회화적 평면과 입체, 현실과 비현실, 물질과 비물질, 사물과 이미지를 동시다발적으로 제공하는 신비롭지만 조금은 서늘한 무대가 된다. 무대 안의 무대, 그 무대 안의 또 다른 무대는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한 번 더 흔들고, 보이는 것-환영과 실재하는 것 사이의 틈을 선명히 하는 동시에 흐릿하게 한다. 극중극에서 무대 위의 등장인물이 배우이자 관객이 되는 것처럼, 전시장의 감상자는 작품을 응시하는 동시에 무대 위에서 행위하는 이중적 존재가 된다. 서로 다른 차원에서 온 작품 속 인물들과 일시적으로 혼연일체가 되어 이미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대이고 인간들은 배우와 같다. 어쩌면 무대라는 허구의 공간에서 자기가 아닌 다른 이,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14) 몰입할 수밖에 없는 연극 무대가 서서히 휘몰아친다.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또 하나의 세계,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시도하는 또 하나의 시공간이다. 실재함에도 지극히 비현실적이어서 무의식이나 꿈속의 세계에 빠진 것 같다. 환상이 눈앞에 또렷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품과 현실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서로의 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작품의 공간은 확장된다. 작품들은 현실을 한껏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만큼 실재하는 세계는 상상을 흡수한다. 시가 그렇듯 환상은 굳어버린 나-우리의 내면과 밖(세상)을 유동하고 반응하게 이끈다. 경직된 것들을 유연하게 한다. 


정화하다 희박하게 하다 고갈시키다 부수다

파종하다 번식시키다 양육하다 부수다.15)


마지막 장면에서 꺼내려고 아껴둔 말이 있다. 사실, 염지희의 작업을 처음 본 순간부터, 감상과 분석을 펼쳐내기에 앞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다. 예리할 정도로 정교한 콜라주 회화는 그 자체로 시선을 붙잡는다. 때로는 그저 보고 느끼기만을 즐길 필요도 있다. 작가의 콜라주 회화-시는 감각적이고 매혹적이다. 그리고 “모든 진정한 예술 애호가는 장면scène에 홀린다.”16) 

 




1) 폴 엘뤼아르, 「투시도 알베르 플로콩의 판화에 관한 시」, 『엘뤼아르 시 선집』, 조윤경(역), ㈜을유문화사, 2023, p. 390.

2)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박찬국(역), 책세상, 2024, p. 144.

3)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박찬국(역), 아카넷, 2022, p. 54.

4) 이문정과 염지희, 1차 인터뷰, 인천아트플랫폼 작가 작업실, 2025.1.20.

5) 이문정 진행, <토탈세미나 동시대 미술의 행간, 염지희: 실재와 허상의 서사>, 염지희 전화 인터뷰, 토탈미술관, 2025.2.20.

6) W. G. 제발트, 『캄포 산토』, 이경진(역), ㈜문학동네, 2021, p. 227.

7) 염지희, 「작가 노트」, 『염지희 포트폴리오』, 2025.

8) 염지희, 2025.

9) 프리드리히 니체, 2022, pp. 53-54.

10) 이문정과 염지희, 2025.1.20. ; 이문정과 염지희, 2차 인터뷰, ZOOM, 2025.2.12.

11) 루돌프 슈타이너, 『색채의 본질』, 양억관, 타카하시 이와오(역), 물병자리, 2016, pp. 23-26. ; 테오도르 압트, 『융 심리학적 그림해석』이유경(역), 분석심리학연구소, 2019, p. 104.

12) 자크 데리다, 『거짓말의 역사』, 배지선(역), 이숲, 2023, pp. 8-9.

13) 로지 잭슨, 『환상성』, 서강여성문학연구회(역), ㈜문학동네, 2004, p. 23, pp. 32-33.

14) 김보현,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읽기』, 세창미디어, 2019, p. 76. ; “이 세상은 하나의 무대. 남자나 여자나 인간은 모두가 연기자로다. 그들은 등장하고 퇴장한다. 한평생 동안 사람은 여러 가지 역할을 맡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당신이 좋으실 대로』, 이태주(역), 푸른생각, 2022, p. 53.

15) 폴 엘뤼아르, 「고뇌와 불안」, 2023, p. 159.

16) 파스칼 키냐르,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송의경(역), ㈜문학과지성사, 2023, p. 178.




*본 비평은 2025 인천아트플랫폼 기획전시 《녹투라마: 발렌틴의 도끼 Nocturama: Valentin's Ax》 도록에 수록된 글 입니다.  

녹투라마 : 발렌틴의 도끼 온라인 도록

그에게 바치는 외로움



김유빈 (고양시청 문화예술과· 예술창작공간 해움 새들 큐레이터)





더레퍼런스에서 진행된 염지희 개인전 《이런 꿈을 꾸었다 The Ornament Hermit : I dreamed of this》에서는 그간 지켜본 염지희 작가의 작품과 어딘지 달라진 풍경을 만나볼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띄게 어둠이 짙어졌다. 짤막한 전시 서문과 동일한 글로 구성된 전시장 벽의 월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이런 꿈을 꾸었다. 마치 우주에 홀로 남은 듯, 나는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 서있었다.

   개인적으로 “칠흑같다”는 우리말을 좋아한다. 어두움이 극대화되어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컴컴하고 숨 막히는 고립의 상태를 나타내기에 꼭 맞는 단어. 이 말을 접할 땐 문자 그대로 옻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컴컴한 진액 속에 갇힌 듯, 시공간이 멈춘 우주 한복판에서 적막을 마주하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진공의 상태가 아득히 떠오른다. 그리고 이 말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그 형용할 수 없는 고요 속에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만 같아 그에게 쉽게 내적 친밀감이 형성되곤 한다. 이번 염지희 개인전의 전시 회화업에서는 대체로 그러한 적막함이 도드라졌고, 곳곳의 텍스트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연필과 목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어둠을 압착하여 수행적으로 드러낸  듯한 회화에서 작가가 겪은 짙은 고요한 시간들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파편적, 다발적으로 공존하던 인물들에서 개인적, 집중적 단일 인물로 소재가 축소되었다. 그간 염지희 작가가 평면에 다수의 배우를 올려 옴니버스식의 무대를 연출했다면, 2020년부터 발표한 평면에서는 출연자 개개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앞선 전시에서는 히스테릭한 감정이나 분열 증세 등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 소재 배치와 환경 조성이 작업의 중심에 있었다면, 최근에는 오히려 그러한 감정들로부터 초월한듯한 개인의 상태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눈에 띄는 점은 온전한 인체가 아닌 절단되거나 수면과 밀밭 또는 눈밭의 지평선에 잠긴 부분적 신체다.


 허리 밑에는 은빛으로 물결치는 밀밭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사유 체계가 보다 섬세해졌다. 염지희작가는 초창기부터 작업에  ‘꿈’, ‘밤’, ‘사슴’, ‘까마귀’ 따위의 보편적인 초현실적 소재를 사용하길 즐겼는데, 최근 보인 작업에서는 몇가지 특정 문학 작품 레퍼런스에 밀착하여 작업의 결(염지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품의 질감”)을 구체화해간다. 염지희가 인용하는 나쓰메 소세키의 『열흘 밤의 꿈』과 프란츠 카프카의  『꿈』, 그리고 이번 전시에 직접적으로 영감을 준 W.G.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와 『이민자들』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설정 외에도 감정적으로는 등장인물 내면의 고립을 다룬다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특히 전시의 제목이자 대표 월텍스트 문구인 “the ornament hermit(장식적 은둔자)” 는 『토성의 고리』의 캐릭터이자 실존 작가 토머스 브라운을 묘사하는 제발트의 표현을 직접 인용한 것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은둔자의 고독이 염지희의 작업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회화 이전에 영상영화를 전공해서인지 염지희가 발표하는 프로젝트에서는 독특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도 역시 연극적 연출이 관통하는데, 앞서 묘사했듯 새까만 배경에 은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듯 빛을 내는 인물의 등장이 그러하고, 서사를 상상하게 하는 동적 장면의 연속이 그러하다. 염지희 작가는 주로 기록사진에서 수집한 실존 이미지를 콜라주 재료로 삼고 이를 드로잉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평면을 전개한다. 이렇게 현실 이미지가 초현실적인 가공의 이미지와 밀착해서 엉키는 부분에는 염지희 특유의 묘한 이질감이 삽입되어 감상에 순간적인 제동이 걸린다. 염지희는 멈칫하는 찰나에 감상자만의 해석이 끼어들 수 있도록 두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그가 수집한 이미지와 레퍼런스 삼은 문학 작품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여기에 관객의 감수성을 덧붙이는 이 일련의 행위가 그림의 독창적인 아우라와 더해져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이번 전시는 특히 그가 경험한 꿈의 순간으로 작가 자신을 다시 위치시키고 그곳에 관객을 소환하는 행위가 반복적으로 요구되어 특히나 주술적으로 보였다.

   집요하리만치 꿈을 기록하고, 그 꿈의 잔상을 쫓으며 작품 안에 잡아매려는 염지희의 일상이 환경적으로는 고독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를 독창적인 미감으로 승화시켜내는 그의 능력 때문인지, 그림으로 투영해 보는 그는 오히려 온전한 안정감에 둘러 싸인 듯하다. 처음에는 작가가 영감을 만나려 꿈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나 십여 년간 염지희의 작업을 지켜본 지금에 와서는 그가 먹먹한 심상과 초현실적 아름다움을 만나는 꿈속의 찰나를 일상 속에서 간절히 만나길 은근하게 즐기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꿈의 뒤를 쫓는 것 같지만, 현실 어디에서도 금세 꿈을 소환해 내는 주술사처럼 아주 능동적인 자세로 꼿꼿이 자신의 일상을 꿈으로 물들여 가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매일 밤 나에게 찾아오는 꿈,

 꿈이 그토록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 본 글은 염지희 개인전 《The Ornament Hermit : "I dreamed of this."》 (더레퍼런스, 2023.12.13~12.24)의 전시 리뷰로 작성되었습니다. 





낯선 공간,역할의 빈틈을 찾는 일



황신원(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작가 염지희는 낯선 공간 속으로 들어가기를 즐긴다.이 공간은 입구도 출구도 없고,어둠과 빛도 구분되지 않는다.어디로부터 유리된듯한 풍경이 화면 한가운데를 떠다닌다.표정을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은 시선을 회피한다.은밀한 기억이나 경험,상상을 자극하는 그녀의 심리적 풍경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독특한 은유와 상징적 모티브가 다양하게 등장하는 화면은 마치 또 다른 세계를 안내하는 통로와 같다.생경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 관람자는 작가 내면에 잠재된 심리와 창작의 근원에 호기심을 지닌 채 기이한 풍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예술작업은 남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다.그렇기에 예술은 경험이나 직관,감각,상상 등 다양한 요소를 기반으로,인간으로서의 나 그리고 내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과 답변일 것이다.염지희 작가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가 가능한 그리스 신화,그리고 시-장 뤽낭시Jean Luc Nancy의<코르푸스Corpus>,정영효의<계속 열리는 믿음>,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냉담의 시Poesie del disamore> -와 같은 문학적 텍스트를 통해 받은 영감으로,문자가 지닌 한계를 뛰어넘는 이미지와 공간을 창조한다.텍스트를 독해하고 음미하고 해체하면서 작가는 텍스트가 지닌 여러 가지 의미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시킬 수 있는 지점을 찾아 나간다.작품 제목뿐만 아니라 작품 내용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텍스트는 낯선 이미지와 조응하며 독창하고 섬세한 뉘앙스로 변모된다.심상을 촉발시키는 문학적 텍스트를 탐미하고 발견해 나가는 과정은 작가에게 창작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행위이다.




의미의 발생뿐만 아니라 상징적 의미가 구축되는 방식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는 콜라주 기법을 이용한다.콜라주는 무엇이든,어떻게든,유연하게 서로 연결되고 담아낼 수 있는 조형적 태도이다.이를 통해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을 결합함으로써 물리적ㆍ심리적 공간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며,고정관념을 벗고 사물에 대한 직관을 뒤쫓아 폭넓은 사고와 인식의 틀을 경험하게 한다.먼저 작가는 버려진 사물의 외면과 그 대상을 인식하는 작가의 내면이 교차하는 접점을 찾는다.그 잔영을 작업의 맥락으로 끌어옴으로써,작업은 다층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다양한 매체로 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게 된다.동시에 상이한 맥락에서 조합된 오브제 사이의

긴장감은 모호한 내러티브와 분위기를 형성한다.이 접붙임의 행위는 관점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평범하고 익숙하게 우리를 규정지어 온 것들의 존재를 일깨운다.어떤 현상과 사물의 의미를 바라보는 고정관념,세상을 관조하는 사고방식의 틀을 인식시켜 새로운 맥락으로 그 경계 바깥에서 내부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콜라주된 사진 이미지나 오브제는시간과 기억을 연결시키는 매개가 된다.사진 속 그곳,오브제가 발견되었던 장소의 실체는 이미 또는 언젠가 사라지지만,시간의 흐름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와 오브제는 콜라주의 과정을 거치며 영속성을 지닌다.여기에‘기억’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행위이다.기억은 고통,슬픔,기쁨,희망의 감정이 축적된 시간과,무수한 감정의 파편이 녹아 있는 장소를 넘나드는 특별한 창작의 통로이다.그래서 염지희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평면에서 입체(설치)로,더 나아가 움직임(퍼포먼스)으로 시간과 공간을 확장해 나간다.폐허와 같은특정 장소에서 물질과 행위,경험적인 에피소드가 덧붙여지면서 한편의 드라마는 완성된다.이제과거의 불안과 상처,긴장을 응시하며 현재와 미래를 구체적인 에피소드와 장면으로 기술한다.가상의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제거되고 현실 공간과 대상,그것들의 몸짓으로 연극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인간의 두 눈은 각기 다른 지점을 직시하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상을 만들고 인식한다.작가 염지희는 어느 한곳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립적인 시선으로,평정의 감각으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고자 한다.흑과 백의 이분법적인 시각이나 개념으로 구분되어 왔던 삶과 죽음,몸과 정신,감성적인 직관과 이성적인 논리,의식과 무의식,이성과 비이성,꿈과 현실,등 이 모든 대립적 요소들의 경계를 허물고 그 양가적 가치 안의 모순과 역설을 드러내고자 한다.하나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기에,빈 곳을 찾아 계속 질문하는 자로서의 역할이 예술가에게 부여된다.그것이 염지희의 창작이다.작가가 던지는 질문에는 인간의 삶과 본성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담겨있고,혼돈과 모순의 현실 속에서 더 깊은 진실을 밝히고 세상이 돌아가는 기본 질서를 드러내려는 희망을 내비친다.무수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작가는가장 많은 성장과 깨달음을 스스로의 작업을 통해 얻고 있는 듯하다.




염지희의 작업은 상상을 통해 살아 흐르는 것,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보다 열린 세계를 갈구하는 행위이자 끝없는 자유로운 몸짓이다.역설적이면서모순적인 요소들을 응시하고 투영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의 근원은 이분할 수 없는 예술 세계와 예술가로서의 자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현실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곧 예술이고,예술가로서‘나’를 일깨우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그녀의 사유와 상상이 텍스트와 이미지,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나들며 빈 곳을 찾아 어디로든 유유히 자유롭게 흘러나가기를 기대한다.

무[案無]의 연극성,연극적 공간,형이상학적이지 않은 몸

 


김남수 (무용·미술 평론가)





#1. “물질이란 얼마간은 자연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여 삶에 언제나 색다른 열정을 주지만 곧 그것은 자신의 온 몸 속에 혼란을 일으킨다.”

(마리아복음서 제4장 중에서)


#2. “그렇다면 사유는 어디서부터 다시금 외계로 향하는 경로를 개척할 수 있을까?”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85쪽




염지희 작가의 개인전<오크 에스트 에님 코르푸스 메움(이것이 진정 나의 몸이니)>(2016년,행화탕)관람은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배우 없는 연극’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종의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되었습니다.이 극장이라는 공간은 주어진 장소에 디자인되어 있는 상관관계의 휴먼드라마가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염지희 작가는 오히려 그러한 상관관계적 원환에서 떠나고자 그 극장 공간을 열리도록 장치한 것 같습니다.연극이란 무엇인가요.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민주주의의 학습장 같은 것이었고,여전히 공동체의 유아론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장르입니다.염지희 작가는 그러한 유아론적 코기토에서 일단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동시에 관람객들에게 그러한 체험적이며 재현적인 세계-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며,그 앎을 확인하는 것처럼 되어 있는 세계-를 인지하고 그 상호주관적 그물망을 찢고 빠져나가기를 권하는 것 같았습니다.그렇게 우묵한 공간은마치 동굴처럼,새로운 삶의 서블라임한 상태를 권하는 동굴처럼 장치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배우 없는 연극’의 공간은 이처럼 움직이는 깊이처럼 안쪽으로 향하지만,교묘하게 동선화되어 있어서 높이의 영역으로 상승하게 됩니다.마치 어떤 산정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산정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다른 산정을 찾아서 끊임없이 능선을 걷는 것,걷기의 예술로 되어 있었습니다.어쩌면 그 걷기함수의 해로서 걸음의 단위,들숨과 날숨의 비율,공간적 분절 그리고 동굴 속처럼 보이지만 실은 외계로 향하는 경로 등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디자인된 것 같았습니다.그만큼 이 동선화된 공간,빔의 즉자적계시의 공간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안무[案無]라는 고안된 개념은 원환적인 반복을 거듭하는 공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작업과 연루되어 있습니다.작가의 어떤 변이를 경험하는 것이아니라 아예 표상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 이전의 사유로부터 견인해오는 작업입니다.염지희 작가는 세계의 사물이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을 열어주는 퍼스펙티브보다는 우리가 어떤 변명으로도 무지한 그 무엇에 대 한,불가능한 열림의 가능성의 중심[medium]에 대한 퍼스펙티브를 권하는 것 같습니다.그러한 퍼스펙티브에는 기능적인 담화,어떻게 그것이 성립되는가를 빙 둘러서 말하기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내용은 언급하는 순간,그 자체로 상관관계의 원환 속에 다시 묶이고 수렴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이런 이유로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상[相] --여기서 상[相]은‘서로’라는 뜻과‘이미지’라는 뜻을 함께 갖습니다-을 만들지 말라.”

관람객인 저의 눈 앞에 놓여진 작품들은 그러한 불가능하고 낯선 세계의 구성적인 분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그것이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작품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외계로 빠져 달아나려는,그러나 온전히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새로운 의식의 분쟁과 갈등이 싹트도록 촉발하는 어떤 매개물이나 신성한 사물처럼 여겨졌습니다.물질이란 염지희 작가에게 마리아복음에서 언급되듯"자연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혹은 역행하는 생명성의매체지만,그의 회화 작업은 그 물질적 생명 상태가"온 몸에 혼란을 일으키고"다른 상태들과 얽히거나 변신하는 단계로 다가왔습니다.이 신화적 변신담은 까마귀 같은 새들,식물적인 영험의 잔여를 풍기는 사슴뿔,생명의 다른 사물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 인간 신체 등등이 분자적 결합이나 균열의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었습니다.주요한 작품 중에 세 개의 거울처럼 살짝 각도가 형성되어 있는-무한의 이미지 분사가 끝없이 일어나는-프레임이 있습니다.그리고 그 프레임은 바탕이 되는 평면이 너울거리고 있습니다.마치 벽이 울듯이 커브가 잡힌 평면의 타블로 위에 많은 분열과 조합의 변신담이 천변만화 하게 하는 삼면경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울고 있는 평면은'숨은 차원'(리사 랜들)을 드러내는 공간입니다.변신의 모티브는 그'숨은 차원'에 힘입어서 다른 생명종과의 기괴하고 동시에 익숙한,그러면서도 작가 스스로의 충동적 에너지를 실은 타입으로 변주됩니다.거기서 중요한 것은 변신하는 그 몸체들이 형이상학적인 단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몸체로서 윤곽지어진 위상학적 조건을 거울,평면 프레임,파괴와 균열 그리고 결합,식물적 충동같은 에너지의 조건이 변화시킨다고 할까요.전-개체적인 단계,개체화되어 있지만 그 이전의 잠재적인 단계에서 다른 생명과의 조우를 전면적으로 겪는다고 할까요.우묵한 동굴 속에서 삼칠일을 보내면,동물의 영혼이 신격으로 변한다고 하듯이.제가 생각컨대, '그리피니즘'은 그런 변신조합이 이루어진 그리핀같은 생명의 전-개체적 결합술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닐까 합니다.염지희 작가의 변신담에는 모든 사물들에 생명의 징후가 있다는 범심론이 느껴집니다.이렇듯 언뜻 요약하거나 언급하기 곤란할 만큼 그 생명적 사물들-역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은 그 동굴 같은 공간의‘배우 없는 연극’속에 반쯤 녹아들어 있었고,마치 북미인디언의 다발지어진 한 단어의 언어-한 단어가 기나긴 뜻의 문장을 뜻하는 언어-처럼 우리에게 무언의 말을 한 무데기 건네고 있었습니다.무언의 말로서'그리피니즘'현상.아마도 그 행화탕이란 공간이 가진 공간적 권능과 상관없이 그 덩어리진 말의 건넴은 염지희 작가가 강하게 주박시켜놓은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것 같았습니다.그것은 몇 가지의 수행적인 타입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다음의 명령문은 어떤가요.


“나를 만지지 마라.”(부활한 예수)


어쩌면 염지희 작가는 이 명령적이며 실효적인 발언이 갖는 의미망에 주목하면서도 그 의미망을 펼쳐서 일종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이 수행문은 낭시 같은 철학자에 의해서 어떤 맥락과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지,안무[按舞]적 전략이 있는 몸의 새로운 제시인지 밝혀집니다.가령, “만지면 안 되는 것,그것은 부활한 몸이다.우리는 또한 그것이 만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져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그 몸은 만질 것이 아닌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사실이,그의 몸이 공기화된 육체,혹은 비물질적인 몸,유령의 몸,환영으로서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이어지는 텍스트는 이 몸이 만져질 수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혹은 차라리,이 몸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접촉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31-32쪽)이에 대해서는 염지희 작가는“어쩌면 비어있는 그 자체에 대한 확신만이 남아있다”고 정리합니다. ‘비어있는 몸’이란 무엇인가요.

여기서 우선 말해야 할 대목은 인간의 몸에 주어진조건입니다.인간의 몸은 태어날 때부터 이 세계로부터 일정한 고유공간을 할양받습니다.몸피가 커지면서 그 고유공간은 늘어나지만,이 공간에 대한 점유력은 그대로 있습니다.이 고유공간이 사라지는 것은 화장할 때뿐입니다.엠페도클레스의 에트나 화산 다이빙,헤라클레스의 산 채로 화장 같은 신화적 퍼포먼스는 이 고유공간의 사실성에 관한 것입니다.이 사실성은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일회적이지만 죽음과 결부되어 있어서 실존하지 않습니다.초월적이며 현상학적이기만 합니다.그럼으로써 상관관계적 구조에 묶이지 않은 채, ‘비어있음’자체로 존립하는 영역을 격렬하게 드러낸다고 할까요.염지희 작가가 말하는‘비어있는 몸’은“떠도는 그림자만이 남은”동시에“진리가‘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끊임없이 갈구하는”대상일까요.주체일까요.의식 없는 비인칭의 흔적일까요.그럴지도 모릅니다. <오크 에스트 에님 코르푸스 메움>전시는 그 자체가‘비어있는 몸’처럼 기능하는 극장이자 연극이니까요.안으로 걸음을 떼어놓을수록 빈 동굴처럼 우묵해지는 기분 속에서 우리는 작품이라는 사물과‘나’의 주관적 관계 안에 있는 감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감각과의 차단이 일어납니다.마치 마리아에게“나를 만지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럼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염지희 작가의 이 작품들은 놀랍게도 빵과 포도주처럼 다시 한번 몸의 그것,세계의 몸처럼 접경하는 살의 그것으로서 동시적으로 노출됩니다.만지지 말라는 급작스런 금지적 명령은 다가오라는,점근선적으로 다가와서“변성하라! -- Alter your consciousness!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전-개체화된 단계에 있으라.일종의 문지방[limen]처럼‘비어있는 몸’은 하나의 매개가 됩니다.접촉이란 국면이 바뀝니다.만짐과만져짐,봄과 보여짐이라는 소위 메를로-퐁티식의‘살’과의 접촉이 아니라 만짐을 통한 진리가‘여기에 있다’라는 확신의 불가능성과 함께 그 만질 수 없음의 조건 때문에 더욱 강렬해지는 갈망 사이에서 분리와 접속으로. (여기에 대해서20세기의 아방가르드 연극의 역사는‘실체적 분리’보다는‘변성의식[altered states]을 통한 결합’이 우세했습니다.아르토라는 절대정신은 물질적 신체의 결합술 없이는 작동할 수 없었습니다.

염지희 작가의 연극은 전유하지 않고 증언하는 연극,일종의 마리아 연극을 하는 것일지 모릅니다.마리아는 마치‘불립문자’처럼 나머지 사도들에게 달려와서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달했고,그 전달 행위는 지극히 마리아-적인 방식의 언술로 이루어집니다.울고 있는 평면 위에 놓여진 삼면경 같은 이야기가마리아복음서입니다.이 복음의 저자는‘비어있는 몸’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가 모두 다릅니다.예수의 부활된 몸을 마주하고 요한과 도마와 마리아가 보여준 각각의 역할은 염지희 작가에게 중요합니다.요한은"보지 않고 믿는"그노시스트라면,도마는"만지고서도 의심하는"실증주의자일까요.도마복음서는 그 실증성이 얼마나 중요한 도약이 일어나는 플랫폼인가를 암시합니다.그렇다면,마리아의 경우는--? "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수행성에 직면한 사람입니다.접경하고 분쟁하는 몸과의 터치가 금해지는,그 고유공간의 고유성을 내버려두는 사람.그러나 이 전시는 이 세명의 다중적 관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마치 이 전시로부터“다양한 시선들이 교차하는 것을 바랐습니다”(염지희 작가)라고 말하는 것처럼.그런데 이 통상적인 의도는 이 경우에 맥락이 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무엇인가 하면, ‘지금 여기’로부터,우리의 내부적인 것,상관관계의 쳇바퀴 같은 것,철학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로 보였습니다.절대적 외부를 상상하기라고 할까요.

사슴뿔을 만나고,부러진 나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사람의 몸이 변형되는 것을 접하고,걸음을 옮겨놓자 네온사인이 어떤 메시지를 마치 모래 속 의 낙뢰 흔적처럼 전달하고 있습니다.이 연극은 걸음을 떼어놓으면서 어떤 모티브의 반복,반복적인 몇 가지 모티브가 어떻게 바리에이션을 일으키는가를 보게 되지만,그러한 푸가적인 반복에서 떨어져나가게 됩니다.그보다는 사물로부터,상황으로부터,환경으로부터 부분과 전체 사이의 모종의 수축과 알 수없는 확장-마치 무한처럼-이 들숨날숨처럼 작동하는 것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이를 즉자적 계시라고 할까요.해석적인 틀로부터 자유로워진,요약하거나 관념적인 언어의 스케치를 받는 것이 곤란해지는 연극처럼,실제로 연극이 되듯이.

낭시의<코르푸스>는 인간의 몸에 관한 책이지만,인간의 몸에 대한 책이 아니기도 합니다.이 책은 과도하며,형이상학적입니다.염지희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몸의 가능세계”에 관한 책입니다.그러므로 이 책은 골칫덩어리입니다.동시에 시선의 다양한 전개에 효모처럼 개입할 수 있습니다.염지희 작가가 말하는“시선의 다양성”이란 자유로워진 연극성의 전시가 어떤 공간적 전회를 하고 있는가에 주목하지만,그 주목의 끝에 응결되는 해석적 틀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계속 다른 생각,헛생각 그리고 우발성의 생각을 개방할 수 있는가와 관련됩니다.즉 이 전시는 사유의 가능성에 관한 작가의 실험이 깃들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즉자적 계시는 어떤 작품들의 질서가 보여주는 흐름을 결코 인간적으로 경험하는 선에 머무르지 않고,그렇다고 담론적 언어로 그 흐름의 법칙을 표상할 수 없는 단계입니다.메이야수에 따르면,그냥 사실적인 단계입니다.사실성의 함축이 충만한 세계에서 염지희 작가의 개별 작품들,아니 전시 단계의 세계관이 경이적입니다.형이상학적 잔해물을 사용하여 지은 이 연극은 인간이 인간적인 체험의 여러 영역,상관관계의 축약된 통념 영역,미술적인 것의 경계 영역같은 동시대 미술의 여러 촉수뻗기와는 결이 다른 진행입니다.독자적인 행간이 돋보입니다.개념적인 오늬-화살 끝에 오목한 부분-를 잘 만들어서 다른 오늬들과 함께 결합하는 괄호[號]의 연극이기도 합니다.이 오늬에 걸려서 삿대로부터 날아가는 화살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요.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염지희 작가의 가까운 미래가.그러나 이에 대한 이야기는 미래의 몫으로 남겨둬야 하고,지금까지 이야기한 작업의 분석은 좀더 면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숙제라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3.잠깐씩 밝아졌다가 잠깐씩 그대로였으므로 볼 수 있었다


비 내리는 날 첨탑이 벼락을 끓여들이는 광경을.그때 끝이 저물어버린 시간과 시간이 내색하는 배경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계속되는 끝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닿기 전과 닫은 흔적이 만나서 뚫리게 되는,이를테면 조금만 어긋나도 달아나버리는 것 그래서 모든게 드러나는 순간


첨탑과 벼락의 끝이 궤적을 거둬들이는 중이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곳,그러나 자꾸 알고 싶은 곳,있던데가 없는데로 돌아와 남겨진 순서로 완성되기 시작하는


그 끝이 잠깐씩 보였다가 잠깐씩 머리속을 지나갔다


나는 멈추었는데도 멈추지 못한 사람들 속에 서 있었다 아무도 말걸지 않고 누군도 알 수 없는 끝으로,이어지는 길 위에서 먹먹하게


_정영효,시‘단절’중에서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

 


홍경한 (미술 평론가)

 




1.

인간이 표현의 방법을 터득한 이후 줄곧 되물음 했던 것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나(ego)’에 대한 탐미였다. 나를 알아가기 위한 과정은 인간이 현실을 살아가는 한 사라지지 않을 영원성의 축이며, 무수히 억압하고 옥죄는 현실적인 것들과 적당히 유지해야할 관계, 변화하려는 욕구에 대한 욕망, 작품에 대한 실험적인 시도의 총체라 해도 그르지 않다.

 

그렇다면 나를 포괄하는 존재란 무엇에 의해 증명되며, 어떤 조타에 의해 유속을 달리하곤 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그것이 실존과 무관한 것은 아니요, 시야에 잔상이 맺는다하여 그것이 반드시 존재성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건 ‘나’의 사유 속에서만이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을 뿐이다. 즉 사유하는 그 순간만이 나의 존재를 증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선 염지희의 작업도 동일한 맥락을 따른다.

 

사실 내 속의 모든 것을 끄집어낸다는 행위적인 측면에서 ‘나’라는 대명사는 곧 사유와 등치를 이룬다. 시각예술에선 사유가 완성될 때 비로소 가시적 양태, 다시 말해 ‘형상’이 수반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 속 형상과 개념은 ‘나’와 동시에 수용되며, 이는 염지희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초가 된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 사유의 측면과 사건의 관점이 교차되고, 실재와 언어가 공존한다. 한편으론 각각의 역할에 충실한 재현성을 띠는 누군가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서성댄다. 그것들은 분열된 내적, 비판적 타자로써 중립적-중성적인 태도로 접근하거나 ‘존재’에 대한 시선이라는 일관된 주제 아래 화면을 배회하는 유형학적 모습을 드러내며 콜라주로 인한 실체적 허구-구성적 번안에 머물기에 건조하고 차가운 외상(外像)의 언저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흔적들에는 삶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온기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어느 정도 간극을 유지한 채 염지희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그의 예술을 구체화하는 여러 알고리즘(algorithm)은 히스테리, 불안, 그로데스크, 허무, 죽음, 두려움 등이다. 괴팍한 모습을 한 등장인물들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히치콕의 <새>나 이브 끌랭의 퍼포먼스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다소 염세적이기까지 하다. 일례로 그의 그림에 자주 모습을 비추는 사슴과 같은 연약한 초식동물들은 작가 내면에 드리운 나약함과 어두움을 가리킨다. 한 겨울에 서 있는 것 마냥 앙상한 나무들은 나에 대한 나 자신의 투영이며, 넓은 여백 안에 자릴 잡고 있는 질서 속 무질서는 불안을 상기케 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특히 <복합적 판타지-1(complex fantasy-1)>(2010)을 비롯해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그림에서 자주 출몰하는 까마귀는 불안감의 소환이자 기시적 단초로 묘사된다. 물론 동물들 못지않게 주목을 끄는 여러 인물들은 나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찢어져 나뉘거나 갈라짐을 상징하는 언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다분히 호환적이며 상호적, 유기적이다. 흡사 염지희 ‘감독’의 ‘주관적 다큐멘터리’로의 확장을 도모하듯 서로 간 낮고도 진득하게 호흡하면서 객관적 기록(사실의 나열)을 넘어 그의 예술언어를 생성시키는 주요한 분동(分銅)으로 자리한다. 당연히 그 분동의 무게는 나를 중심으로 한 무게-실존에 대한 끝없는 확인에 있으며, 그에게 그림은 곧 하나의 현실이자 좌절과 절망, 불측지연의 조마조마함과 생의 의미가 교차하는 복잡다단한 ‘무대’이다.

 


2.

 작가는 이 불완전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무대에서 자기 내부에 똬리 튼 절망과 히스테리를 극복하기 위한 진실한 자기성찰을 투영한다. 마치 일기마냥 일련의 전개를 통해 치유의 문제로 다가선다. 이는 ‘나’에 의해 촉발되어 우리의 해석을 담보하고, 그 해석의 자유로움으로 회귀하는 수순을 밟으며, 길고 긴 시간의 터널을 해체해 처음으로 귀환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이를 비인위적 모놀로그(Monologue)라고 명명하는 게 적합하다고 본다.

 

비인위적 모놀로그(Monologue). 작가는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기까지 생의 주체로써의 심적 유재(遺在)를 부여잡은 채 새로운 조형언어를 만들고 있다. 앞서 거론한 히스테리나 불안과 같은 여러 키워드는 은유적인 동시에 다중적 의미를 내포하며, 작품이 담고 있는 작가 개인의 사상과 철학이 어떻게 동시대와 유기적인 관련성을 지니면서 사회와 역사 속에서 발현되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증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증표의 첫 번째 발화가 색(色)이다.

 

염지희는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사물의 밝고 어두움이나 빨강, 파랑, 노랑 따위의 물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색의 개념에 충실한 편이 아니다. 굳이 색이라면 무채색 위주에 머문다. 그에게 색은 일정한 구조의 구성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고, 나아가 색 자체가 본래적으로 구조를 함축한다. 또한 그에게 색은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내지 않지만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추상적인 암호이다. 넓은 공간, 건조한 색을 통해 비극적 상황과 불안감, 두려움과 같은 주제들을 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표현상 ‘콜라주’ 방식도 그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염지희는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빠른 작업을 위해 연필과 콩테를 주로 사용하며, 패브릭이나 종이, 캔버스 내 상주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을 콜라주로 처리한다. 그가 지금은 잘 활용되지 않는 콜라주를 표현 방식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 형상을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직조하면서 이야기를 꾸미려는 의도에 따른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들은 다양한 이야기, 내레이션을 느낄 수 있고 굉장히 다변적이다. 어느 한 가지 정답만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기에 다층적 결과마저 기대되는 흥미로움을 안고 있다.

 

새로움에 관한 또 하나는 해석의 여유로움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동시상영을 넘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이 한꺼번에 상영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의 시(詩)를 인용한 작품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2015)처럼 화면 중앙을 중심으로 확장되는 구성의 작품도 많으나, <오필리아의 체스보드(Ophelia's chess board)>(2012)에서마냥 복잡하고 나열적인 구성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작품들을 보면 관람객의 다수는 해석이 모호한, 느려지게 하는 장면들 탓에 혼란을 느끼는 반면 되레 이 지점에서 해석은 빛을 발한다. 이를 현상학(phenomenology)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들에선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요한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t)가 주창한 본체의 현상을 연구하는 수준에서 작업의 연속성이 있음을 읽는다. 형식면에서는 주관적 구성주의를 통한 ‘객관으로의 전향(轉向)’을 무의식 아래 의도하고 있음도 발견한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에선 선험적 현상학, 다시 말해 인식론적 시야에서 의식과 대상과의 관계를 넘어선, ‘자아의 의식’이라는 좁은 범위의 프레임에서 탈피해 물질과 생명의 원형적 질서를 탐미하고 존재론적 시야로의 스펙트럼과 삶-배경, 기억-환류 등을 염두에 둔 인간과 사회, 나와 세계라는 형이상학적 존재의 구조, 직접적으론 현존의 논리를 읊는 과정이 강하게 엿보인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그의 작업을 정의하는 핵심이라 여긴다.

 


3.

오늘날 작가 염지희의 작품들은 단순한 재현(再現)을 지나 하나의 관념적 공간, 공감 가능한 인식공간으로의 전환적 매개(媒介)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느 면에선 단순한 정지가 아닌 풍부한 상상력을 동반하는 도상학적 개념을 지니거나, 입체적 알고리즘을 형성하는 분자적 관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기까진 예술에 어느 정도 식견을 가진 이라면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헌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다루는 소재들이 아주 정적으로, 내면에서 층위로 승화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동물과 콜라주 행위 인물을 비롯한 기하학적 도상 등, 다양한 상징체가 부유하지만 내적 상태를 투각해 자신만의 언어를 창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흡사 작은 퍼즐들이 집합을 이뤄내듯 가시적 관점에서 볼 때 파편적인, 그리고 그 표면에 부유하는 표현형식의 어울림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그 속엔 불완전한 속성을 지닌 대상(그것이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어떤 특별한 경험을 기초로 한 우리일 수도 있다.)의 기저에 놓인 상향적 푼크툼(punctum)적 요소들이 나지막이 들어서 있다. 특히 쉬르리얼에 가까운 듯하면서도 낭만적인 성격마저 엿보이는 조형성은 위에서 언급한 상징체들과 교합하며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달리 말해 염지희의 언어이며 때론 절망적 충동에 가까운 은유적 실체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들은 형식적인 부분에 많은 눈길을 할애 받으나 자유로운 타자의 상상이 이입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에 가장 중요한 건 ‘상황(situation)’이다. 우리가 그의 여러 연작에서 우선적으로 인지 가능한 것은 정적이고 가끔은 지나치게 고요하여 역동성과는 거리를 두는, 즉 비극의 가장 감동적인 구성요소의 하나인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와는 다소 다른 연극적 ‘상황’이라는 것이다.(필자는 이를 ‘순간적 지연의 연속성’이라 부른다.)

 

이는 정지된 듯 순간적 지연에 몰입된 인물들, 스냅처럼 멈춰서 있는 경관들, 화면 곳곳에 도포되어 있는 인물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상황’에서 작가 내면에 놓인 피안의 틈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엔 일정한 흐름이 깃들어 있다. 읽기 쉽지 않음이 사실이나 느린 유속의 순환이 놓여 있고, 작가적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그것의 정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잃어버린 사유요, 내면에 투각(透刻)되어 빚어진 삶의 단상들 혹은 존재론적 고찰, 그 자체이다.

 

염지희의 작품들이 특별한 색깔을 낼 수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인간 정신작용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명징하게 깨달을 수 없지만(나조차도 그와의 대화를 거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갔거나 일부를 전부인 냥 예단했을 것이 자명하다. 작가는 그의 모든 그림 속 장치들을 ‘교란’이라고 칭하는데 필자도 동의한다.) 흥미롭게도 이것이 곧 그의 작품들을 그 이상의 매체로 끌어 올리는 고유한 철학적 근간이 됨은 부정하기 어렵다.

 

설사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몸으로 느끼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정도의 여백은 제공한다. 조용하면서도 나지막한, 그러나 내면의 울림이 작지 않은 일종의 공명을 전달한다. 아무 생각 없이 다가서 마주할 지라도 그의 작업 속엔 그 만의 일렁임이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 커다란 충격을 준다거나 시각적 강렬함은 나타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정신적, 심리적 갈등으로 인한 정신신경증으로부터 빚어진 특유의 파동을 감지하는 것, 이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 공명을 언급하는 이유로 아쉬움이 없다.

 

어쩌면 그건 작가적 삶을 반추하고 현실을 포갠, 실재자(實在者)로써 겪어야하는 고독하고 힘든 여정을 보다 진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며, 작업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번뇌와 불투명한 이중고에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인생의 여정과 애환이 처마 아래 어둠처럼 깃들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원리와 원인에 대한 고찰이 즉석에서 생성되는 흑연의 세세한 스침마냥 마음 속 생채기, 뚜렷한 대상을 매개로 막연하거나 미완성 상태로 남은 감정에 형을 부여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지희의 작품은 개인사와 사회사가 맞물려 있기에 유독 시선을 끈다. 그 끝이 언젠가 비워지고 또 비워져 텅 빈 그릇만이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일 수도, 존재자가 존재자인 한에서 갖는 공통된 존재는 은폐되고 존재에의 물음은 잊히는 것에 대한 공명의 수단으로 예술일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건 그의 모든 표현은 나와 관계없는 듯싶지만 결국 나와 관계 깊은 곳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이요, 그것은 때로 관조적이고 망루에 선 듯한 여운도 있지만 자신이 하나의 사변적 시간과 물리적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인색하지 않음으로써 변화하는 어떤 촉매에 능동적으로 다가서 발화와 산출을 거듭하며 파국을 향해 줄달음치는 내적 상황, 우리 내면의 깊은 무언가에 등을 돌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가 만들어낸 화면은 타자와 화자 간 계층 없는 오감이 교차하는 장소이자, 실상에 존재하는 자신을 비롯한 안식으로서의 공간이며 연필과 콜라주로 응집한 다양한 흔적들, 이야기들은 작가 마음의 대리로 자리한다. 그곳에서 우린 지각하는 인간만이 깨달을 수 있는 관념과 이성, 판단과 가치관을 함축한 ‘사유’라는 대하를 만나고, 늘 되묻고 부딪히는 자문의 틀에 갇힌 우리네 마음을 비시와 같은 인간 삶의 여정에 이입시킨 채 욕망과 욕구를 비롯한 다양한 현실적인 것들, 이상화되곤 해도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조건들과 조우한다.

 

작가는 이를 엉뚱한 인물들과 낯설고도 친숙한 풍경이라는 상징을 통해 역설적으로 전환시켜 놓고 있다. 비록 강요는 하지 않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약간의 주지는 가능한 서사를 함유하고 있으며 싫든 좋든 삶의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번뇌와 불투명한 고뇌에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인간들의 애환이 처마 아래 어둠처럼 깃들어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 속 내레이션은 작가의 것이지만 실상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사연에 얽힌 정신적 외상, 죽음으로써의 탄생, 날카로운 고통이 되곤 하는 새벽의 기상, 잠깐의 행복과 돌아갈 수 없는 깨어남의 찌꺼기…. 죽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도 자지 않고 귀머거리처럼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게 어디 특정인의 몫인가. 아니니까.■

 


1)  작가는 이와 관련해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조차도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언어의 바깥을 경험할 수 없다는 허무함과 해석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듯한 죽음과도 같은 무기력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작품 전반에 풍기는 멜랑콜리한 분위기는 이러한 허무주의적인 상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2)  작가는 이와 관련해 “본인의 작품 속에서 연극적인 무대는 교란되고 위태로우며 죽음이 도사리는 곳이다. 그곳에 콜라주 된 인물들은 죽음을 모르는 역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상징적인 죽음 앞에서 죽지도 살지도 않은 기괴한 그들의 모습처럼 우리는 분열과 해방의 모호한 경계에서 주체성의 상실과 획득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적인 형상의 항상성 안에서 주체성은 존재한다.”고 밝힌바 있다.


3)  이와 같은 필자의 시선은 작가의 발언에서 확실히 뒷받침된다. 그는 “허무함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나의 모순적인 태도는 흑백의 콜라주와 복합적인 구성으로 시각 언어에 해석이 지연되는 지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4)  이는 기실 독일 관념론자인 게오르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언급한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해 후설(Edmund Husserl)의 선험적 현상학, 경험치 못한 세계로부터 이어진 순수의식의 범위로 확대되어 절대지(絶對知)에 이르기까지 의식 발전과정의 서술과 맞닿는다.

 

5)  푼크툼(punctum)은 철학자 롤랑바르트가 그의 마지막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한 것으로 확 찌르는 듯 강렬하게 다가오는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염지희의 작업에서의 푼크툼은 잔잔하다는 게 특징이다.

 

6)  체사레 파베세 『공상의 끝』 일부 인용

 

7)  체사레 파베세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