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낯선 공간,역할의 빈틈을 찾는 일



황신원(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작가 염지희는 낯선 공간 속으로 들어가기를 즐긴다.이 공간은 입구도 출구도 없고,어둠과 빛도 구분되지 않는다.어디로부터 유리된듯한 풍경이 화면 한가운데를 떠다닌다.표정을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은 시선을 회피한다.은밀한 기억이나 경험,상상을 자극하는 그녀의 심리적 풍경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독특한 은유와 상징적 모티브가 다양하게 등장하는 화면은 마치 또 다른 세계를 안내하는 통로와 같다.생경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 관람자는 작가 내면에 잠재된 심리와 창작의 근원에 호기심을 지닌 채 기이한 풍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예술작업은 남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다.그렇기에 예술은 경험이나 직관,감각,상상 등 다양한 요소를 기반으로,인간으로서의 나 그리고 내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과 답변일 것이다.염지희 작가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가 가능한 그리스 신화,그리고 시-장 뤽낭시Jean Luc Nancy의<코르푸스Corpus>,정영효의<계속 열리는 믿음>,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냉담의 시Poesie del disamore> -와 같은 문학적 텍스트를 통해 받은 영감으로,문자가 지닌 한계를 뛰어넘는 이미지와 공간을 창조한다.텍스트를 독해하고 음미하고 해체하면서 작가는 텍스트가 지닌 여러 가지 의미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시킬 수 있는 지점을 찾아 나간다.작품 제목뿐만 아니라 작품 내용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텍스트는 낯선 이미지와 조응하며 독창하고 섬세한 뉘앙스로 변모된다.심상을 촉발시키는 문학적 텍스트를 탐미하고 발견해 나가는 과정은 작가에게 창작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행위이다.




의미의 발생뿐만 아니라 상징적 의미가 구축되는 방식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는 콜라주 기법을 이용한다.콜라주는 무엇이든,어떻게든,유연하게 서로 연결되고 담아낼 수 있는 조형적 태도이다.이를 통해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을 결합함으로써 물리적ㆍ심리적 공간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며,고정관념을 벗고 사물에 대한 직관을 뒤쫓아 폭넓은 사고와 인식의 틀을 경험하게 한다.먼저 작가는 버려진 사물의 외면과 그 대상을 인식하는 작가의 내면이 교차하는 접점을 찾는다.그 잔영을 작업의 맥락으로 끌어옴으로써,작업은 다층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다양한 매체로 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게 된다.동시에 상이한 맥락에서 조합된 오브제 사이의

긴장감은 모호한 내러티브와 분위기를 형성한다.이 접붙임의 행위는 관점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평범하고 익숙하게 우리를 규정지어 온 것들의 존재를 일깨운다.어떤 현상과 사물의 의미를 바라보는 고정관념,세상을 관조하는 사고방식의 틀을 인식시켜 새로운 맥락으로 그 경계 바깥에서 내부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콜라주된 사진 이미지나 오브제는시간과 기억을 연결시키는 매개가 된다.사진 속 그곳,오브제가 발견되었던 장소의 실체는 이미 또는 언젠가 사라지지만,시간의 흐름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와 오브제는 콜라주의 과정을 거치며 영속성을 지닌다.여기에‘기억’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행위이다.기억은 고통,슬픔,기쁨,희망의 감정이 축적된 시간과,무수한 감정의 파편이 녹아 있는 장소를 넘나드는 특별한 창작의 통로이다.그래서 염지희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평면에서 입체(설치)로,더 나아가 움직임(퍼포먼스)으로 시간과 공간을 확장해 나간다.폐허와 같은특정 장소에서 물질과 행위,경험적인 에피소드가 덧붙여지면서 한편의 드라마는 완성된다.이제과거의 불안과 상처,긴장을 응시하며 현재와 미래를 구체적인 에피소드와 장면으로 기술한다.가상의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제거되고 현실 공간과 대상,그것들의 몸짓으로 연극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인간의 두 눈은 각기 다른 지점을 직시하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상을 만들고 인식한다.작가 염지희는 어느 한곳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립적인 시선으로,평정의 감각으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고자 한다.흑과 백의 이분법적인 시각이나 개념으로 구분되어 왔던 삶과 죽음,몸과 정신,감성적인 직관과 이성적인 논리,의식과 무의식,이성과 비이성,꿈과 현실,등 이 모든 대립적 요소들의 경계를 허물고 그 양가적 가치 안의 모순과 역설을 드러내고자 한다.하나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기에,빈 곳을 찾아 계속 질문하는 자로서의 역할이 예술가에게 부여된다.그것이 염지희의 창작이다.작가가 던지는 질문에는 인간의 삶과 본성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담겨있고,혼돈과 모순의 현실 속에서 더 깊은 진실을 밝히고 세상이 돌아가는 기본 질서를 드러내려는 희망을 내비친다.무수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작가는가장 많은 성장과 깨달음을 스스로의 작업을 통해 얻고 있는 듯하다.




염지희의 작업은 상상을 통해 살아 흐르는 것,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보다 열린 세계를 갈구하는 행위이자 끝없는 자유로운 몸짓이다.역설적이면서모순적인 요소들을 응시하고 투영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의 근원은 이분할 수 없는 예술 세계와 예술가로서의 자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현실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곧 예술이고,예술가로서‘나’를 일깨우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그녀의 사유와 상상이 텍스트와 이미지,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나들며 빈 곳을 찾아 어디로든 유유히 자유롭게 흘러나가기를 기대한다.

무[案無]의 연극성,연극적 공간,형이상학적이지 않은 몸


김남수(미술평론가)





#1. “물질이란 얼마간은 자연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여 삶에 언제나 색다른 열정을 주지만 곧 그것은 자신의 온 몸 속에 혼란을 일으킨다.”

(마리아복음서 제4장 중에서)


#2. “그렇다면 사유는 어디서부터 다시금 외계로 향하는 경로를 개척할 수 있을까?”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85쪽




염지희 작가의 개인전<오크 에스트 에님 코르푸스 메움(이것이 진정 나의 몸이니)>(2016년,행화탕)관람은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배우 없는 연극’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종의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되었습니다.이 극장이라는 공간은 주어진 장소에 디자인되어 있는 상관관계의 휴먼드라마가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염지희 작가는 오히려 그러한 상관관계적 원환에서 떠나고자 그 극장 공간을 열리도록 장치한 것 같습니다.연극이란 무엇인가요.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민주주의의 학습장 같은 것이었고,여전히 공동체의 유아론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장르입니다.염지희 작가는 그러한 유아론적 코기토에서 일단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동시에 관람객들에게 그러한 체험적이며 재현적인 세계-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며,그 앎을 확인하는 것처럼 되어 있는 세계-를 인지하고 그 상호주관적 그물망을 찢고 빠져나가기를 권하는 것 같았습니다.그렇게 우묵한 공간은마치 동굴처럼,새로운 삶의 서블라임한 상태를 권하는 동굴처럼 장치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배우 없는 연극’의 공간은 이처럼 움직이는 깊이처럼 안쪽으로 향하지만,교묘하게 동선화되어 있어서 높이의 영역으로 상승하게 됩니다.마치 어떤 산정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산정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다른 산정을 찾아서 끊임없이 능선을 걷는 것,걷기의 예술로 되어 있었습니다.어쩌면 그 걷기함수의 해로서 걸음의 단위,들숨과 날숨의 비율,공간적 분절 그리고 동굴 속처럼 보이지만 실은 외계로 향하는 경로 등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디자인된 것 같았습니다.그만큼 이 동선화된 공간,빔의 즉자적계시의 공간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안무[案無]라는 고안된 개념은 원환적인 반복을 거듭하는 공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작업과 연루되어 있습니다.작가의 어떤 변이를 경험하는 것이아니라 아예 표상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 이전의 사유로부터 견인해오는 작업입니다.염지희 작가는 세계의 사물이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을 열어주는 퍼스펙티브보다는 우리가 어떤 변명으로도 무지한 그 무엇에 대 한,불가능한 열림의 가능성의 중심[medium]에 대한 퍼스펙티브를 권하는 것 같습니다.그러한 퍼스펙티브에는 기능적인 담화,어떻게 그것이 성립되는가를 빙 둘러서 말하기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내용은 언급하는 순간,그 자체로 상관관계의 원환 속에 다시 묶이고 수렴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이런 이유로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상[相] --여기서 상[相]은‘서로’라는 뜻과‘이미지’라는 뜻을 함께 갖습니다-을 만들지 말라.”

관람객인 저의 눈 앞에 놓여진 작품들은 그러한 불가능하고 낯선 세계의 구성적인 분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그것이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작품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외계로 빠져 달아나려는,그러나 온전히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새로운 의식의 분쟁과 갈등이 싹트도록 촉발하는 어떤 매개물이나 신성한 사물처럼 여겨졌습니다.물질이란 염지희 작가에게 마리아복음에서 언급되듯"자연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혹은 역행하는 생명성의매체지만,그의 회화 작업은 그 물질적 생명 상태가"온 몸에 혼란을 일으키고"다른 상태들과 얽히거나 변신하는 단계로 다가왔습니다.이 신화적 변신담은 까마귀 같은 새들,식물적인 영험의 잔여를 풍기는 사슴뿔,생명의 다른 사물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 인간 신체 등등이 분자적 결합이나 균열의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었습니다.주요한 작품 중에 세 개의 거울처럼 살짝 각도가 형성되어 있는-무한의 이미지 분사가 끝없이 일어나는-프레임이 있습니다.그리고 그 프레임은 바탕이 되는 평면이 너울거리고 있습니다.마치 벽이 울듯이 커브가 잡힌 평면의 타블로 위에 많은 분열과 조합의 변신담이 천변만화 하게 하는 삼면경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울고 있는 평면은'숨은 차원'(리사 랜들)을 드러내는 공간입니다.변신의 모티브는 그'숨은 차원'에 힘입어서 다른 생명종과의 기괴하고 동시에 익숙한,그러면서도 작가 스스로의 충동적 에너지를 실은 타입으로 변주됩니다.거기서 중요한 것은 변신하는 그 몸체들이 형이상학적인 단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몸체로서 윤곽지어진 위상학적 조건을 거울,평면 프레임,파괴와 균열 그리고 결합,식물적 충동같은 에너지의 조건이 변화시킨다고 할까요.전-개체적인 단계,개체화되어 있지만 그 이전의 잠재적인 단계에서 다른 생명과의 조우를 전면적으로 겪는다고 할까요.우묵한 동굴 속에서 삼칠일을 보내면,동물의 영혼이 신격으로 변한다고 하듯이.제가 생각컨대, '그리피니즘'은 그런 변신조합이 이루어진 그리핀같은 생명의 전-개체적 결합술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닐까 합니다.염지희 작가의 변신담에는 모든 사물들에 생명의 징후가 있다는 범심론이 느껴집니다.이렇듯 언뜻 요약하거나 언급하기 곤란할 만큼 그 생명적 사물들-역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은 그 동굴 같은 공간의‘배우 없는 연극’속에 반쯤 녹아들어 있었고,마치 북미인디언의 다발지어진 한 단어의 언어-한 단어가 기나긴 뜻의 문장을 뜻하는 언어-처럼 우리에게 무언의 말을 한 무데기 건네고 있었습니다.무언의 말로서'그리피니즘'현상.아마도 그 행화탕이란 공간이 가진 공간적 권능과 상관없이 그 덩어리진 말의 건넴은 염지희 작가가 강하게 주박시켜놓은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것 같았습니다.그것은 몇 가지의 수행적인 타입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다음의 명령문은 어떤가요.


“나를 만지지 마라.”(부활한 예수)


어쩌면 염지희 작가는 이 명령적이며 실효적인 발언이 갖는 의미망에 주목하면서도 그 의미망을 펼쳐서 일종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이 수행문은 낭시 같은 철학자에 의해서 어떤 맥락과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지,안무[按舞]적 전략이 있는 몸의 새로운 제시인지 밝혀집니다.가령, “만지면 안 되는 것,그것은 부활한 몸이다.우리는 또한 그것이 만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져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그 몸은 만질 것이 아닌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사실이,그의 몸이 공기화된 육체,혹은 비물질적인 몸,유령의 몸,환영으로서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이어지는 텍스트는 이 몸이 만져질 수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혹은 차라리,이 몸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접촉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31-32쪽)이에 대해서는 염지희 작가는“어쩌면 비어있는 그 자체에 대한 확신만이 남아있다”고 정리합니다. ‘비어있는 몸’이란 무엇인가요.

여기서 우선 말해야 할 대목은 인간의 몸에 주어진조건입니다.인간의 몸은 태어날 때부터 이 세계로부터 일정한 고유공간을 할양받습니다.몸피가 커지면서 그 고유공간은 늘어나지만,이 공간에 대한 점유력은 그대로 있습니다.이 고유공간이 사라지는 것은 화장할 때뿐입니다.엠페도클레스의 에트나 화산 다이빙,헤라클레스의 산 채로 화장 같은 신화적 퍼포먼스는 이 고유공간의 사실성에 관한 것입니다.이 사실성은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일회적이지만 죽음과 결부되어 있어서 실존하지 않습니다.초월적이며 현상학적이기만 합니다.그럼으로써 상관관계적 구조에 묶이지 않은 채, ‘비어있음’자체로 존립하는 영역을 격렬하게 드러낸다고 할까요.염지희 작가가 말하는‘비어있는 몸’은“떠도는 그림자만이 남은”동시에“진리가‘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끊임없이 갈구하는”대상일까요.주체일까요.의식 없는 비인칭의 흔적일까요.그럴지도 모릅니다. <오크 에스트 에님 코르푸스 메움>전시는 그 자체가‘비어있는 몸’처럼 기능하는 극장이자 연극이니까요.안으로 걸음을 떼어놓을수록 빈 동굴처럼 우묵해지는 기분 속에서 우리는 작품이라는 사물과‘나’의 주관적 관계 안에 있는 감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감각과의 차단이 일어납니다.마치 마리아에게“나를 만지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럼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염지희 작가의 이 작품들은 놀랍게도 빵과 포도주처럼 다시 한번 몸의 그것,세계의 몸처럼 접경하는 살의 그것으로서 동시적으로 노출됩니다.만지지 말라는 급작스런 금지적 명령은 다가오라는,점근선적으로 다가와서“변성하라! -- Alter your consciousness!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전-개체화된 단계에 있으라.일종의 문지방[limen]처럼‘비어있는 몸’은 하나의 매개가 됩니다.접촉이란 국면이 바뀝니다.만짐과만져짐,봄과 보여짐이라는 소위 메를로-퐁티식의‘살’과의 접촉이 아니라 만짐을 통한 진리가‘여기에 있다’라는 확신의 불가능성과 함께 그 만질 수 없음의 조건 때문에 더욱 강렬해지는 갈망 사이에서 분리와 접속으로. (여기에 대해서20세기의 아방가르드 연극의 역사는‘실체적 분리’보다는‘변성의식[altered states]을 통한 결합’이 우세했습니다.아르토라는 절대정신은 물질적 신체의 결합술 없이는 작동할 수 없었습니다.

염지희 작가의 연극은 전유하지 않고 증언하는 연극,일종의 마리아 연극을 하는 것일지 모릅니다.마리아는 마치‘불립문자’처럼 나머지 사도들에게 달려와서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달했고,그 전달 행위는 지극히 마리아-적인 방식의 언술로 이루어집니다.울고 있는 평면 위에 놓여진 삼면경 같은 이야기가마리아복음서입니다.이 복음의 저자는‘비어있는 몸’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가 모두 다릅니다.예수의 부활된 몸을 마주하고 요한과 도마와 마리아가 보여준 각각의 역할은 염지희 작가에게 중요합니다.요한은"보지 않고 믿는"그노시스트라면,도마는"만지고서도 의심하는"실증주의자일까요.도마복음서는 그 실증성이 얼마나 중요한 도약이 일어나는 플랫폼인가를 암시합니다.그렇다면,마리아의 경우는--? "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수행성에 직면한 사람입니다.접경하고 분쟁하는 몸과의 터치가 금해지는,그 고유공간의 고유성을 내버려두는 사람.그러나 이 전시는 이 세명의 다중적 관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마치 이 전시로부터“다양한 시선들이 교차하는 것을 바랐습니다”(염지희 작가)라고 말하는 것처럼.그런데 이 통상적인 의도는 이 경우에 맥락이 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무엇인가 하면, ‘지금 여기’로부터,우리의 내부적인 것,상관관계의 쳇바퀴 같은 것,철학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로 보였습니다.절대적 외부를 상상하기라고 할까요.

사슴뿔을 만나고,부러진 나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사람의 몸이 변형되는 것을 접하고,걸음을 옮겨놓자 네온사인이 어떤 메시지를 마치 모래 속 의 낙뢰 흔적처럼 전달하고 있습니다.이 연극은 걸음을 떼어놓으면서 어떤 모티브의 반복,반복적인 몇 가지 모티브가 어떻게 바리에이션을 일으키는가를 보게 되지만,그러한 푸가적인 반복에서 떨어져나가게 됩니다.그보다는 사물로부터,상황으로부터,환경으로부터 부분과 전체 사이의 모종의 수축과 알 수없는 확장-마치 무한처럼-이 들숨날숨처럼 작동하는 것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이를 즉자적 계시라고 할까요.해석적인 틀로부터 자유로워진,요약하거나 관념적인 언어의 스케치를 받는 것이 곤란해지는 연극처럼,실제로 연극이 되듯이.

낭시의<코르푸스>는 인간의 몸에 관한 책이지만,인간의 몸에 대한 책이 아니기도 합니다.이 책은 과도하며,형이상학적입니다.염지희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몸의 가능세계”에 관한 책입니다.그러므로 이 책은 골칫덩어리입니다.동시에 시선의 다양한 전개에 효모처럼 개입할 수 있습니다.염지희 작가가 말하는“시선의 다양성”이란 자유로워진 연극성의 전시가 어떤 공간적 전회를 하고 있는가에 주목하지만,그 주목의 끝에 응결되는 해석적 틀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계속 다른 생각,헛생각 그리고 우발성의 생각을 개방할 수 있는가와 관련됩니다.즉 이 전시는 사유의 가능성에 관한 작가의 실험이 깃들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즉자적 계시는 어떤 작품들의 질서가 보여주는 흐름을 결코 인간적으로 경험하는 선에 머무르지 않고,그렇다고 담론적 언어로 그 흐름의 법칙을 표상할 수 없는 단계입니다.메이야수에 따르면,그냥 사실적인 단계입니다.사실성의 함축이 충만한 세계에서 염지희 작가의 개별 작품들,아니 전시 단계의 세계관이 경이적입니다.형이상학적 잔해물을 사용하여 지은 이 연극은 인간이 인간적인 체험의 여러 영역,상관관계의 축약된 통념 영역,미술적인 것의 경계 영역같은 동시대 미술의 여러 촉수뻗기와는 결이 다른 진행입니다.독자적인 행간이 돋보입니다.개념적인 오늬-화살 끝에 오목한 부분-를 잘 만들어서 다른 오늬들과 함께 결합하는 괄호[號]의 연극이기도 합니다.이 오늬에 걸려서 삿대로부터 날아가는 화살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요.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염지희 작가의 가까운 미래가.그러나 이에 대한 이야기는 미래의 몫으로 남겨둬야 하고,지금까지 이야기한 작업의 분석은 좀더 면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숙제라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3.잠깐씩 밝아졌다가 잠깐씩 그대로였으므로 볼 수 있었다


비 내리는 날 첨탑이 벼락을 끓여들이는 광경을.그때 끝이 저물어버린 시간과 시간이 내색하는 배경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계속되는 끝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닿기 전과 닫은 흔적이 만나서 뚫리게 되는,이를테면 조금만 어긋나도 달아나버리는 것 그래서 모든게 드러나는 순간


첨탑과 벼락의 끝이 궤적을 거둬들이는 중이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곳,그러나 자꾸 알고 싶은 곳,있던데가 없는데로 돌아와 남겨진 순서로 완성되기 시작하는


그 끝이 잠깐씩 보였다가 잠깐씩 머리속을 지나갔다


나는 멈추었는데도 멈추지 못한 사람들 속에 서 있었다 아무도 말걸지 않고 누군도 알 수 없는 끝으로,이어지는 길 위에서 먹먹하게


_정영효,시‘단절’중에서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

 

홍경한(미술평론가)

 


1.

인간이 표현의 방법을 터득한 이후 줄곧 되물음 했던 것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나(ego)’에 대한 탐미였다. 나를 알아가기 위한 과정은 인간이 현실을 살아가는 한 사라지지 않을 영원성의 축이며, 무수히 억압하고 옥죄는 현실적인 것들과 적당히 유지해야할 관계, 변화하려는 욕구에 대한 욕망, 작품에 대한 실험적인 시도의 총체라 해도 그르지 않다.

 

그렇다면 나를 포괄하는 존재란 무엇에 의해 증명되며, 어떤 조타에 의해 유속을 달리하곤 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그것이 실존과 무관한 것은 아니요, 시야에 잔상이 맺는다하여 그것이 반드시 존재성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건 ‘나’의 사유 속에서만이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을 뿐이다. 즉 사유하는 그 순간만이 나의 존재를 증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선 염지희의 작업도 동일한 맥락을 따른다.

 

사실 내 속의 모든 것을 끄집어낸다는 행위적인 측면에서 ‘나’라는 대명사는 곧 사유와 등치를 이룬다. 시각예술에선 사유가 완성될 때 비로소 가시적 양태, 다시 말해 ‘형상’이 수반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 속 형상과 개념은 ‘나’와 동시에 수용되며, 이는 염지희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초가 된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 사유의 측면과 사건의 관점이 교차되고, 실재와 언어가 공존한다. 한편으론 각각의 역할에 충실한 재현성을 띠는 누군가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서성댄다. 그것들은 분열된 내적, 비판적 타자로써 중립적-중성적인 태도로 접근하거나 ‘존재’에 대한 시선이라는 일관된 주제 아래 화면을 배회하는 유형학적 모습을 드러내며 콜라주로 인한 실체적 허구-구성적 번안에 머물기에 건조하고 차가운 외상(外像)의 언저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흔적들에는 삶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온기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어느 정도 간극을 유지한 채 염지희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그의 예술을 구체화하는 여러 알고리즘(algorithm)은 히스테리, 불안, 그로데스크, 허무, 죽음, 두려움 등이다. 괴팍한 모습을 한 등장인물들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히치콕의 <새>나 이브 끌랭의 퍼포먼스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다소 염세적이기까지 하다. 일례로 그의 그림에 자주 모습을 비추는 사슴과 같은 연약한 초식동물들은 작가 내면에 드리운 나약함과 어두움을 가리킨다. 한 겨울에 서 있는 것 마냥 앙상한 나무들은 나에 대한 나 자신의 투영이며, 넓은 여백 안에 자릴 잡고 있는 질서 속 무질서는 불안을 상기케 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특히 <복합적 판타지-1(complex fantasy-1)>(2010)을 비롯해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그림에서 자주 출몰하는 까마귀는 불안감의 소환이자 기시적 단초로 묘사된다. 물론 동물들 못지않게 주목을 끄는 여러 인물들은 나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찢어져 나뉘거나 갈라짐을 상징하는 언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다분히 호환적이며 상호적, 유기적이다. 흡사 염지희 ‘감독’의 ‘주관적 다큐멘터리’로의 확장을 도모하듯 서로 간 낮고도 진득하게 호흡하면서 객관적 기록(사실의 나열)을 넘어 그의 예술언어를 생성시키는 주요한 분동(分銅)으로 자리한다. 당연히 그 분동의 무게는 나를 중심으로 한 무게-실존에 대한 끝없는 확인에 있으며, 그에게 그림은 곧 하나의 현실이자 좌절과 절망, 불측지연의 조마조마함과 생의 의미가 교차하는 복잡다단한 ‘무대’이다.

 


2.

 작가는 이 불완전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무대에서 자기 내부에 똬리 튼 절망과 히스테리를 극복하기 위한 진실한 자기성찰을 투영한다. 마치 일기마냥 일련의 전개를 통해 치유의 문제로 다가선다. 이는 ‘나’에 의해 촉발되어 우리의 해석을 담보하고, 그 해석의 자유로움으로 회귀하는 수순을 밟으며, 길고 긴 시간의 터널을 해체해 처음으로 귀환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이를 비인위적 모놀로그(Monologue)라고 명명하는 게 적합하다고 본다.

 

비인위적 모놀로그(Monologue). 작가는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기까지 생의 주체로써의 심적 유재(遺在)를 부여잡은 채 새로운 조형언어를 만들고 있다. 앞서 거론한 히스테리나 불안과 같은 여러 키워드는 은유적인 동시에 다중적 의미를 내포하며, 작품이 담고 있는 작가 개인의 사상과 철학이 어떻게 동시대와 유기적인 관련성을 지니면서 사회와 역사 속에서 발현되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증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증표의 첫 번째 발화가 색(色)이다.

 

염지희는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사물의 밝고 어두움이나 빨강, 파랑, 노랑 따위의 물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색의 개념에 충실한 편이 아니다. 굳이 색이라면 무채색 위주에 머문다. 그에게 색은 일정한 구조의 구성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고, 나아가 색 자체가 본래적으로 구조를 함축한다. 또한 그에게 색은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내지 않지만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추상적인 암호이다. 넓은 공간, 건조한 색을 통해 비극적 상황과 불안감, 두려움과 같은 주제들을 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표현상 ‘콜라주’ 방식도 그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염지희는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빠른 작업을 위해 연필과 콩테를 주로 사용하며, 패브릭이나 종이, 캔버스 내 상주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을 콜라주로 처리한다. 그가 지금은 잘 활용되지 않는 콜라주를 표현 방식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 형상을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직조하면서 이야기를 꾸미려는 의도에 따른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들은 다양한 이야기, 내레이션을 느낄 수 있고 굉장히 다변적이다. 어느 한 가지 정답만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기에 다층적 결과마저 기대되는 흥미로움을 안고 있다.

 

새로움에 관한 또 하나는 해석의 여유로움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동시상영을 넘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이 한꺼번에 상영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의 시(詩)를 인용한 작품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2015)처럼 화면 중앙을 중심으로 확장되는 구성의 작품도 많으나, <오필리아의 체스보드(Ophelia's chess board)>(2012)에서마냥 복잡하고 나열적인 구성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작품들을 보면 관람객의 다수는 해석이 모호한, 느려지게 하는 장면들 탓에 혼란을 느끼는 반면 되레 이 지점에서 해석은 빛을 발한다. 이를 현상학(phenomenology)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들에선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요한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t)가 주창한 본체의 현상을 연구하는 수준에서 작업의 연속성이 있음을 읽는다. 형식면에서는 주관적 구성주의를 통한 ‘객관으로의 전향(轉向)’을 무의식 아래 의도하고 있음도 발견한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에선 선험적 현상학, 다시 말해 인식론적 시야에서 의식과 대상과의 관계를 넘어선, ‘자아의 의식’이라는 좁은 범위의 프레임에서 탈피해 물질과 생명의 원형적 질서를 탐미하고 존재론적 시야로의 스펙트럼과 삶-배경, 기억-환류 등을 염두에 둔 인간과 사회, 나와 세계라는 형이상학적 존재의 구조, 직접적으론 현존의 논리를 읊는 과정이 강하게 엿보인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그의 작업을 정의하는 핵심이라 여긴다.

 


3.

오늘날 작가 염지희의 작품들은 단순한 재현(再現)을 지나 하나의 관념적 공간, 공감 가능한 인식공간으로의 전환적 매개(媒介)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느 면에선 단순한 정지가 아닌 풍부한 상상력을 동반하는 도상학적 개념을 지니거나, 입체적 알고리즘을 형성하는 분자적 관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기까진 예술에 어느 정도 식견을 가진 이라면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헌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다루는 소재들이 아주 정적으로, 내면에서 층위로 승화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동물과 콜라주 행위 인물을 비롯한 기하학적 도상 등, 다양한 상징체가 부유하지만 내적 상태를 투각해 자신만의 언어를 창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흡사 작은 퍼즐들이 집합을 이뤄내듯 가시적 관점에서 볼 때 파편적인, 그리고 그 표면에 부유하는 표현형식의 어울림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그 속엔 불완전한 속성을 지닌 대상(그것이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어떤 특별한 경험을 기초로 한 우리일 수도 있다.)의 기저에 놓인 상향적 푼크툼(punctum)적 요소들이 나지막이 들어서 있다. 특히 쉬르리얼에 가까운 듯하면서도 낭만적인 성격마저 엿보이는 조형성은 위에서 언급한 상징체들과 교합하며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달리 말해 염지희의 언어이며 때론 절망적 충동에 가까운 은유적 실체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들은 형식적인 부분에 많은 눈길을 할애 받으나 자유로운 타자의 상상이 이입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에 가장 중요한 건 ‘상황(situation)’이다. 우리가 그의 여러 연작에서 우선적으로 인지 가능한 것은 정적이고 가끔은 지나치게 고요하여 역동성과는 거리를 두는, 즉 비극의 가장 감동적인 구성요소의 하나인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와는 다소 다른 연극적 ‘상황’이라는 것이다.(필자는 이를 ‘순간적 지연의 연속성’이라 부른다.)

 

이는 정지된 듯 순간적 지연에 몰입된 인물들, 스냅처럼 멈춰서 있는 경관들, 화면 곳곳에 도포되어 있는 인물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상황’에서 작가 내면에 놓인 피안의 틈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엔 일정한 흐름이 깃들어 있다. 읽기 쉽지 않음이 사실이나 느린 유속의 순환이 놓여 있고, 작가적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그것의 정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잃어버린 사유요, 내면에 투각(透刻)되어 빚어진 삶의 단상들 혹은 존재론적 고찰, 그 자체이다.

 

염지희의 작품들이 특별한 색깔을 낼 수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인간 정신작용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명징하게 깨달을 수 없지만(나조차도 그와의 대화를 거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갔거나 일부를 전부인 냥 예단했을 것이 자명하다. 작가는 그의 모든 그림 속 장치들을 ‘교란’이라고 칭하는데 필자도 동의한다.) 흥미롭게도 이것이 곧 그의 작품들을 그 이상의 매체로 끌어 올리는 고유한 철학적 근간이 됨은 부정하기 어렵다.

 

설사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몸으로 느끼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정도의 여백은 제공한다. 조용하면서도 나지막한, 그러나 내면의 울림이 작지 않은 일종의 공명을 전달한다. 아무 생각 없이 다가서 마주할 지라도 그의 작업 속엔 그 만의 일렁임이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 커다란 충격을 준다거나 시각적 강렬함은 나타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정신적, 심리적 갈등으로 인한 정신신경증으로부터 빚어진 특유의 파동을 감지하는 것, 이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 공명을 언급하는 이유로 아쉬움이 없다.

 

어쩌면 그건 작가적 삶을 반추하고 현실을 포갠, 실재자(實在者)로써 겪어야하는 고독하고 힘든 여정을 보다 진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며, 작업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번뇌와 불투명한 이중고에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인생의 여정과 애환이 처마 아래 어둠처럼 깃들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원리와 원인에 대한 고찰이 즉석에서 생성되는 흑연의 세세한 스침마냥 마음 속 생채기, 뚜렷한 대상을 매개로 막연하거나 미완성 상태로 남은 감정에 형을 부여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지희의 작품은 개인사와 사회사가 맞물려 있기에 유독 시선을 끈다. 그 끝이 언젠가 비워지고 또 비워져 텅 빈 그릇만이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일 수도, 존재자가 존재자인 한에서 갖는 공통된 존재는 은폐되고 존재에의 물음은 잊히는 것에 대한 공명의 수단으로 예술일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건 그의 모든 표현은 나와 관계없는 듯싶지만 결국 나와 관계 깊은 곳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이요, 그것은 때로 관조적이고 망루에 선 듯한 여운도 있지만 자신이 하나의 사변적 시간과 물리적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인색하지 않음으로써 변화하는 어떤 촉매에 능동적으로 다가서 발화와 산출을 거듭하며 파국을 향해 줄달음치는 내적 상황, 우리 내면의 깊은 무언가에 등을 돌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가 만들어낸 화면은 타자와 화자 간 계층 없는 오감이 교차하는 장소이자, 실상에 존재하는 자신을 비롯한 안식으로서의 공간이며 연필과 콜라주로 응집한 다양한 흔적들, 이야기들은 작가 마음의 대리로 자리한다. 그곳에서 우린 지각하는 인간만이 깨달을 수 있는 관념과 이성, 판단과 가치관을 함축한 ‘사유’라는 대하를 만나고, 늘 되묻고 부딪히는 자문의 틀에 갇힌 우리네 마음을 비시와 같은 인간 삶의 여정에 이입시킨 채 욕망과 욕구를 비롯한 다양한 현실적인 것들, 이상화되곤 해도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조건들과 조우한다.

 

작가는 이를 엉뚱한 인물들과 낯설고도 친숙한 풍경이라는 상징을 통해 역설적으로 전환시켜 놓고 있다. 비록 강요는 하지 않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약간의 주지는 가능한 서사를 함유하고 있으며 싫든 좋든 삶의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번뇌와 불투명한 고뇌에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인간들의 애환이 처마 아래 어둠처럼 깃들어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 속 내레이션은 작가의 것이지만 실상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사연에 얽힌 정신적 외상, 죽음으로써의 탄생, 날카로운 고통이 되곤 하는 새벽의 기상, 잠깐의 행복과 돌아갈 수 없는 깨어남의 찌꺼기…. 죽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도 자지 않고 귀머거리처럼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게 어디 특정인의 몫인가. 아니니까.■

 


1)  작가는 이와 관련해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조차도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언어의 바깥을 경험할 수 없다는 허무함과 해석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듯한 죽음과도 같은 무기력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작품 전반에 풍기는 멜랑콜리한 분위기는 이러한 허무주의적인 상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2)  작가는 이와 관련해 “본인의 작품 속에서 연극적인 무대는 교란되고 위태로우며 죽음이 도사리는 곳이다. 그곳에 콜라주 된 인물들은 죽음을 모르는 역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상징적인 죽음 앞에서 죽지도 살지도 않은 기괴한 그들의 모습처럼 우리는 분열과 해방의 모호한 경계에서 주체성의 상실과 획득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적인 형상의 항상성 안에서 주체성은 존재한다.”고 밝힌바 있다.


3)  이와 같은 필자의 시선은 작가의 발언에서 확실히 뒷받침된다. 그는 “허무함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나의 모순적인 태도는 흑백의 콜라주와 복합적인 구성으로 시각 언어에 해석이 지연되는 지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4)  이는 기실 독일 관념론자인 게오르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언급한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해 후설(Edmund Husserl)의 선험적 현상학, 경험치 못한 세계로부터 이어진 순수의식의 범위로 확대되어 절대지(絶對知)에 이르기까지 의식 발전과정의 서술과 맞닿는다.

 

5)  푼크툼(punctum)은 철학자 롤랑바르트가 그의 마지막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한 것으로 확 찌르는 듯 강렬하게 다가오는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염지희의 작업에서의 푼크툼은 잔잔하다는 게 특징이다.

 

6)  체사레 파베세 『공상의 끝』 일부 인용

 

7)  체사레 파베세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