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열리는 믿음
“박제되고 폐허와 같은 것들”
“그것들은 시간이 켜켜히 쌓여 멈춘듯이 보이는 것들이다”
동인천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아주 오래된 화원이 있었다. 정확히는 폐허와 같은 화원이었다. 천장이 무너져내린 곳에 수많은 화분들이 들어차있었다. 풀잎사귀의 냄새는 없었고 오래된 라면냄새가 진동했다.
화분하나를 사러 들어가자 할아버지가 맞이했고 그 뒤에는 편찬은 듯 보이는 할머니가 있었다. 반년 뒤에 다시 화원을 찾아가보니 화원 안에 모든 화분과 집기는 사라지고 텅빈 채로 문이 잠겨있었다.
창문으로 바라보니 폐허와 같은 곳에 십자가 하나만 덩그러니 벽에 걸려있었다.
나의 가족이 살던 집도 폐허였던 적이 있다. 가족도 집도 생기를 잃었고 집안에 쌓인 온갖 오래된 물건들이 보기 싫고 화가 치밀었다. 모든 것을 혼자서 가차 없이 버렸다. 한참을 버리고 있는데,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신었던 작은 구두와 신발들이 먼지 쌓인 앨범처럼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먼지 쌓인 것들은 모두 우리 가족의 추억이었다. 수많은 감정이 무섭게 스며들면서 그날처럼 어린아이같이 울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느랴 바쁘고 힘이 들었던, 조금씩 쌓여가는 과거를 돌볼 여력이 없었던 우리 가족의 수많은 시간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있을 뿐이었다.
쌓여가는 시간에 바람과 빛을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폐허의 시간에는 바람과 빛이 없다.
오래된 화원 속의 남겨진 십자가, 가족의 추억이 쌓인 폐허의 장면은 서로 교차되어 <<계속 열리는 믿음>>(2016) 시리즈를 작업하는 출발점이 된다.
믿음을 주제로, 정영효 시인의 시집 <계속 열리는 믿음>,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 :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놀리 메 탄게레(나를 만지지마라)>등 3개의 텍스트를 엮으며 총 4개의 장소에서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아마도예술공간,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장, 행화탕, 동인천 만석동 창고)
삶을 모순으로 가득찬 것으로 바라보던 나는 모든 실체를 부정하면서 허무함에 빠졌던 것 같다. 하나의 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자 현기증이 난 것이다. 이제껏 만들어온 작품들이 폐허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바람과 빛이 필요했으며 남겨진 십자가를 찾고 싶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해체하면서도 스스로 해체하지 못하는 믿음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정영효 시인의 <계속 열리는 믿음>은 제목 그자체가 강렬했다. 굳건해야할 믿음은 계속 열리는 것이었다. 믿음조차도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내가 과연 긍정하는 것인지 혹은 체감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믿음의 모순은 어떻게 생과 맞닿아 있는 것인가.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 <놀리 메 탄게레>는 각각 성경 속에서 예수가 말한 구절로부터 믿음에 대한 사유가 전개된다. “이것이 나의 몸이니”, “나를 만지지마라”.
코르푸스는 예수의 몸을 말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빵와 와인을 나누어주며 말한다. “이것이 나의 몸이니”. 낭시는 지금 몸이 여기 있을 진데, 다시금 몸을 반복하고 확인하는 강박 이 말씀에 주목한다. 여기에 있는 몸을 멀어지게 하고, 가장 먼 곳에서 오는 몸은 무엇인가? <코르푸스>의 구성은 매우 파편적이다. 책 속의 글들은 연속성을 상실한 것 같지만 몸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작품과 같다. <코르푸스>는 몸과 가장 유사했으며, 글이 아닌 책 그 자체로써 코르푸스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가 코르푸스로써 믿음을 이야기하려했다면, 믿음은 부를수록 멀어지고 멀어져야만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의 실체마저도 다시금 멀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놀리 메 탄게레>는 예수가 부활하는 장면에서 마리마가 예수를 만지려고 할 때, 예수가 한 말에서 출발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예수는 왜 그의 몸을 만지지 못하게 했을까. 예수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라고 한다. 마리아에게 예수의 부활한 육신은 예수의 시신이 없는 빈 공간을 확인한 것, 그 자체이다.
믿음이 가진 모순은 믿음의 연속성을 자르고 단절하는 것이 아니다. 몸과 같이 ‘한계’를 ‘세워’ 만들어 울타리처럼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빈 공간의 실체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빈 공간을 다시금 지금으로 불러일으키는 것, 계속 열리도록 하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나의 설치작업들은 나의 폐허를 세우는 것 뿐이었다. 시집 <계속 열리는 믿음>은 낱장이 찢어진 채로 낡았고, 여름이 지나 생을 다한 매미의 날개가 꽂혀있었다. 수명을 다한 고목은 뿌리내릴 수 없는 해변의 모래에 세워졌고, 오래도록 방에 붙여뒀던 성모마리아 사진이 오래된 선풍기에 펄럭였다. 깨진 조각상들은 흩어지고 진흙으로 얼굴이 덮인 온전한 조각상만이 파편들을 응시한다. 내가 가장 못나게 쓴 ‘계속 열리는 믿음’과 글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그림같이 그린 ‘계속 열리는 믿음’은 네온싸인이 되어 이곳저곳에서 빛난다.
설치는 후반에 다다랐을 때, 나의 콜라주 작품도 하나의 폐허로 세워졌다. 모순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도 폐허 속에 있었고, 이따금씩 ‘계속 열리는 믿음’으로 빛을 발하는 네온싸인과 부딪혔다. 네온싸인은 콜라주 그림에 비춰 낙뢰처럼 꽂혀있었다.
마지막 설치에서는 콜라주 작품과 함께 쏟아지듯 천장에서 내려오는 조명과 내가 쓴 ‘계속 열리는 믿음’, 어린아이가 쓴 ‘믿음’만이 쓰여있는 네온싸인만 사용했다. 어린아이가 쓴 믿음은 선과 작고 큰 네모, 동그라미로 보이기도 했다. 창고 내부에 있는 문은 조금 열려있어 빛이 새어나오고 문 위에는 못난 글씨로 쓴 네온싸인 ‘계속 열리는 믿음’이 빛난다. 도형과 글씨의 중간에 있는 네온싸인 ‘믿음’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빛나고 눈이 진흙으로 뒤덮인 조각상이 믿음을 응시한다.
빈공간에 세워진 나의 작업 속에서 빈공간은 나 자신이며 관객이었다. 그들은 어떤 믿음의 풍경을 보고 갔을까? 어떤 빈공간에 서서, 시선이 닿는 곳마다 빈 공간들이 사이에 들어차있는 가깝고 먼 것들이 교차된 풍경을 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