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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별을 하나의 상으로 볼 수 없어, 수많은 별을 보았습니다.
하나로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에 별자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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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빛의 형상이 아닌 어두움의 형상을 알아가는 것이다.
어두움을 또렷이 할수록 빛은 더욱 빛난다.
#. 흑백의 콜라주.
누구든 나의 그림을 보았을 때, 콜라주를 선택한 이유와 흑백으로 표현하게 된 계기가 가장 궁금할 것이다. 연필 드로잉과 함께 사진을 오려붙이기 시작한 이유는 (1) 그리는 것이 재미없었다. 그려지는 것이 무의미했고 우발적인 변동의 여지가 없는 것에 지루함을 느꼈다. (2) 내가 의도하는 형상을 누군가의 사진으로 바꾸고 조합하기 시작하자 아주 미세하고 기괴한 어긋남들이 생겨났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3) 흑백사진 시대의 사진들을 보면 사진 속의 인물들이 박제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멈춘 박제같았고, 죽음을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강렬한 흑백의 대비 속의 표정들은 어쩌면 빛과 어둠이 박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백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1) 나는 연필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연필은 빛이 스며든 어두움같다. 다양한 단계의 어두움을 표현할 수 있으며, 빛마저도 표현할 수 있다. 어둡게 칠하면 칠할수록 오히려 미끄럽게 반짝인다. (2) 다양한 시대와 시-공간의 사진들을 하나에 화면에 모을 수 있었다. 각기 다른 출처의 사진들은 한데 모여져서, 하나의 무대에서 서로 다른 시대의 무대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되었다. 내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것처럼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가까운 나라와 지역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심지어 가족마저도, 나이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개개인을 바라보면 수많은 시간의 모습과 형태들이 콜라주처럼 함께 살고 있다. (3) 모두 각기 다른 빛-어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은 각기 다른 얼굴의 주름들이 만들어내는 표정이기도 하고, 각기 다른 명암의 표정처럼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진을 잘라 콜라주를 하면 미세한 원근법의 어긋남과 더불어 광원의 어긋남이 생겨난다. 빛과 그림자의 방향이 제각각인 것이다. 일관된 광원을 찾을 수 없다. 콜라주된 화면은 훤히 밝지만 그 속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빛으로 존재한다. 각기 다른 시간의 형태가 콜라주된 세상처럼, 그 세상 속에는 어느 하나 같지 않은 각기 다른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 사람의 표정과 행위에 따라 다른 어둠이 또한 만들어지고 존재의 형태가 된다.
콜라주한 인물들에게 나를 투영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빛과 어두움이 나의 명암과 동일했던 적은 없다. 언제나 미세하게 어긋나있고, 불일치했다. 어느 곳에서도 도무지 같은 형태의 명암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형태는 내가 원한 것과 거리가 멀다. 유일함을 갖는다는 것에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늑대를 사냥하는 모험담이 아닌, 기진맥진해 숨어든 동굴에서 늑대를 마주하는 것과 같다. 동굴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늑대가 되어야한다. 외로움, 불안, 두려움, 공포 그 자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빛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어두움을 또렷이 할수록 빛은 더욱 빛난다.
0.
Complex Fantasy
“환상이야기는 겹핍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직면하는 서사는 죽음을 모르는 죽음이 존재하는 이야기이다”
모든 이야기는 결핍으로부터 출발한다. 동화, 설화, 신화, 모험담 등 우리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은 것을 채워가는 과정이다. 온전하지 않은 ‘나’라는 주인공이 결핍을 해소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자아를 찾아나가는 이야기들은 마치 연금술과 같아서 주인공의 돌은 물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금이 된다. 이러한 과정의 이야기, 곧 ‘서사’에서 금은 다시 돌로 순환하지 않는다. 실재의 이야기는 금이 곧 돌도 아니요, 죽음이 되는 것이다. (그 죽음은 절벽을 앞에 두고도 희망에 찬 어릿광대처럼 죽음이라는 것조차도 알 수가 없다) 즉, 우리가 직면하는 서사에는 죽음이 있다. 정확히는 죽음이 있으나, 죽음 이후에도 죽음이 없다. 죽음을 모르는 죽음이 있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살아있는 서사가 된다는 것은 죽음을 모르고 살아가며 끊임없이 죽음을 상기하는 것이다.
1.
히스테리로부터 충동의 무대로
자크 라캉. “환상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그 무대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성’이란 언어화하지 못하는 ‘모순’에서 출발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출발점은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였다. 히스테리는 언어의 분열이다. 인간의 언어체계가 거짓과 발작을 동반하며 파열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끝내 히스테리 환자를 규정하지 못했다. 규정하지 못하는 구멍으로써의 주체는 곧, 하나의 주체를 정의하는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흥미롭게도 히스테리는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증상의 주체와 정의가 변화한다. 여성의 자궁이 일으키는 병에서 퇴역한 군인이 앓는 병으로, 언어화되지 못한 영역이 발작하는 ‘사회의 병’이 되었다.
인간의 모순은 히스테리처럼 언어와 언어 사이에 이중으로 구속되어 끼여 있거나, 충동처럼 언어를 무력화하거나 넘어선다. 개인은 언어를 습득하고 상상과 상징 사이를 구축하며 ‘나’라는 주어를 형성한다. 상상과 상징 사이의 구축과정에는 점점 틈이 쌓여 가는데, 쌓여가는 틈이 모순이라고 한다면 누적된 모순에 대한 대응이 곧 개인의 형상이 될 것이다.
나는 누적된 모순은 대부분 히스테리로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이중 구속에서 ‘사느냐, 죽느냐’를 선택한다. 나은 선택이 과연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히스테리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환상은 히스테리가 만들어 놓은 게임의 무대이다. 무엇을 선택해도 우리는 히스테리의 무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충동은 어떠한가. 충동은 언어를 넘어서거나 언어의 이전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인간성의 존립은 항상 언어의 무대 내부를 전제로 한다. 언어의 무대에서 저항하는 방법은 무대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무대를 존립하면서도 무대가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것.
실재의 일부를 가로막거나 제한하는 장치인 무대는 언어의 무대를 닮았다. 무대는 그에 걸 맞는 이야기를 생산하거나, 혹은 이야기를 위한 무대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무대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대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무대의 뒤편을 상기시키거나, 혹은 동시에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 무대에서 ‘나’ 스스로를 연기하는 것이다.
2.
냉담의 시
“그의 눈은 더 이상 하나의 상으로 맺히지 않고
어긋난 두 개의 시선으로 생을 바라봤을 것이다.“
체사레 파베세의 냉담의 시는 그의 발표되지 않은 유작을 모아놓은 시집이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동료들이 출간한 시집의 시들은 제목도 없으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생을 바라보는 체사레 파베세의 시선이 강렬한 시언어로 가득 차 있다. 생의 허무, 기괴함, 경이로움을 오고가는 그의 시는 모순으로 가득 찬 삶을 냉담하게 바라보려 분투하는 것처럼 보인다. 냉담의 시에서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는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죽음은 절대 당신의 삶을 가져가지 않는다. 당신에게 삶을 안겨주고 당신의 눈을 가져간다. 체사레 파베세는 죽음에게 내어준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의 눈은 더 이상 하나의 상으로 맺히지 않고 어긋난 두 개의 시선으로 생을 바라봤을 것이다. 아침, 밤, 새벽, 희망, 좌절, 침묵, 죽음, 삶 모두를 말이다. 거리의 사람들이 숨겨온 고통이 보이고, 희망은 스스로를 뒤틀어 비틀어진다. 집어삼켰던 말들을 침묵이 들려줄 때 가장 먼 새벽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다. 죽음이 다녀간 삶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모순에 모순을 반복하며 언제 끝날지 모를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3.
계속 열리는 믿음
“박제되고 폐허와 같은 것들”
“그것들은 시간이 켜켜히 쌓여 멈춘듯이 보이는 것들이다”
동인천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아주 오래된 화원이 있었다. 정확히는 폐허와 같은 화원이었다. 천장이 무너져내린 곳에 수많은 화분들이 들어차있었다. 풀잎사귀의 냄새는 없었고 오래된 라면냄새가 진동했다. 화분하나를 사러 들어가자 할아버지가 맞이했고 그 뒤에는 편찬은 듯 보이는 할머니가 있었다. 반년 뒤에 다시 화원을 찾아가보니 화원 안에 모든 화분과 집기는 사라지고 텅빈 채로 문이 잠겨있었다. 창문으로 바라보니 폐허와 같은 곳에 십자가 하나만 덩그러니 벽에 걸려있었다.
나의 가족이 살던 집도 폐허였던 적이 있다. 가족도 집도 생기를 잃었고 집안에 쌓인 온갖 오래된 물건들이 보기 싫고 화가 치밀었다. 모든 것을 혼자서 가차 없이 버렸다. 한참을 버리고 있는데,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신었던 작은 구두와 신발들이 먼지 쌓인 앨범처럼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먼지 쌓인 것들은 모두 우리 가족의 추억이었다. 수많은 감정이 무섭게 스며들면서 그날처럼 어린아이같이 울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느랴 바쁘고 힘이 들었던, 조금씩 쌓여가는 과거를 돌볼 여력이 없었던 우리 가족의 수많은 시간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있을 뿐이었다. 쌓여가는 시간에 바람과 빛을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폐허의 시간에는 바람과 빛이 없다.
오래된 화원 속의 남겨진 십자가, 가족의 추억이 쌓인 폐허의 장면은 서로 교차되어 <<계속 열리는 믿음>>(2016) 시리즈를 작업하는 출발점이 된다. 믿음을 주제로, 정영효 시인의 시집 <계속 열리는 믿음>,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 :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놀리 메 탄게레(나를 만지지마라)>등 3개의 텍스트를 엮으며 총 4개의 장소에서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아마도예술공간,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장, 행화탕, 동인천 만석동 창고)
삶을 모순으로 가득찬 것으로 바라보던 나는 모든 실체를 부정하면서 허무함에 빠졌던 것 같다. 하나의 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자 현기증이 난 것이다. 이제껏 만들어온 작품들이 폐허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바람과 빛이 필요했으며 남겨진 십자가를 찾고 싶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해체하면서도 스스로 해체하지 못하는 믿음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정영효 시인의 <계속 열리는 믿음>은 제목 그자체가 강렬했다. 굳건해야할 믿음은 계속 열리는 것이었다. 믿음조차도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내가 과연 긍정하는 것인지 혹은 체감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믿음의 모순은 어떻게 생과 맞닿아 있는 것인가.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 <놀리 메 탄게레>는 각각 성경 속에서 예수가 말한 구절로부터 믿음에 대한 사유가 전개된다. “이것이 나의 몸이니”, “나를 만지지마라”.
코르푸스는 예수의 몸을 말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빵와 와인을 나누어주며 말한다. “이것이 나의 몸이니”. 낭시는 지금 몸이 여기 있을 진데, 다시금 몸을 반복하고 확인하는 강박 이 말씀에 주목한다. 여기에 있는 몸을 멀어지게 하고, 가장 먼 곳에서 오는 몸은 무엇인가? <코르푸스>의 구성은 매우 파편적이다. 책 속의 글들은 연속성을 상실한 것 같지만 몸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작품과 같다. <코르푸스>는 몸과 가장 유사했으며, 글이 아닌 책 그 자체로써 코르푸스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가 코르푸스로써 믿음을 이야기하려했다면, 믿음은 부를수록 멀어지고 멀어져야만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의 실체마저도 다시금 멀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놀리 메 탄게레>는 예수가 부활하는 장면에서 마리마가 예수를 만지려고 할 때, 예수가 한 말에서 출발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예수는 왜 그의 몸을 만지지 못하게 했을까. 예수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라고 한다. 마리아에게 예수의 부활한 육신은 예수의 시신이 없는 빈 공간을 확인한 것, 그 자체이다.
믿음이 가진 모순은 믿음의 연속성을 자르고 단절하는 것이 아니다. 몸과 같이 ‘한계’를 ‘세워’ 만들어 울타리처럼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빈 공간의 실체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빈 공간을 다시금 지금으로 불러일으키는 것, 계속 열리도록 하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나의 설치작업들은 나의 폐허를 세우는 것 뿐이었다. 시집 <계속 열리는 믿음>은 낱장이 찢어진 채로 낡았고, 여름이 지나 생을 다한 매미의 날개가 꽂혀있었다. 수명을 다한 고목은 뿌리내릴 수 없는 해변의 모래에 세워졌고, 오래도록 방에 붙여뒀던 성모마리아 사진이 오래된 선풍기에 펄럭였다. 깨진 조각상들은 흩어지고 진흙으로 얼굴이 덮인 온전한 조각상만이 파편들을 응시한다. 내가 가장 못나게 쓴 ‘계속 열리는 믿음’과 글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그림같이 그린 ‘계속 열리는 믿음’은 네온싸인이 되어 이곳저곳에서 빛난다.
설치는 후반에 다다랐을 때, 나의 콜라주 작품도 하나의 폐허로 세워졌다. 모순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도 폐허 속에 있었고, 이따금씩 ‘계속 열리는 믿음’으로 빛을 발하는 네온싸인과 부딪혔다. 네온싸인은 콜라주 그림에 비춰 낙뢰처럼 꽂혀있었다.
마지막 설치에서는 콜라주 작품과 함께 쏟아지듯 천장에서 내려오는 조명과 내가 쓴 ‘계속 열리는 믿음’, 어린아이가 쓴 ‘믿음’만이 쓰여있는 네온싸인만 사용했다. 어린아이가 쓴 믿음은 선과 작고 큰 네모, 동그라미로 보이기도 했다. 창고 내부에 있는 문은 조금 열려있어 빛이 새어나오고 문 위에는 못난 글씨로 쓴 네온싸인 ‘계속 열리는 믿음’이 빛난다. 도형과 글씨의 중간에 있는 네온싸인 ‘믿음’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빛나고 눈이 진흙으로 뒤덮인 조각상이 믿음을 응시한다.
빈공간에 세워진 나의 작업 속에서 빈공간은 나 자신이며 관객이었다. 그들은 어떤 믿음의 풍경을 보고 갔을까? 어떤 빈공간에 서서, 시선이 닿는 곳마다 빈 공간들이 사이에 들어차있는 가깝고 먼 것들이 교차된 풍경을 보았을까.
4.
나는 미래를 보았다.
“우리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박람회의 눈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엿보거나 장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의 시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명확히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오늘을 확실히 아는 것이 미래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입니다. -뉴욕세계박람회 서문(1939)-
1939년 뉴욕세계박람회는 대공황의 끝자락에서 개최되었으며 ‘미래’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전시명인 ‘나는 미래를 보았다(I HAVE SEEN THE FUTURE)는 뉴욕세계박람회에서 사용된 문구로, 미래를 지금 현재에서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연결짓고 있다.
미래라는 ‘시간’은 어떻게 현재에 존재할 수 있을까. 미래를 보는 자는 누구이며, 미래는 어떻게 보여지는 것인가. 참여작가 김성배(사운드), 목진우(사진), 염지희(연출, 미술), 서영주“(퍼포먼스)는 미래에 타임라인을 만들어 시각화하는 협업을 시도한다.
미래를 마주하는 ‘나’는 누구인가, 불규칙한 노이즈에서 멜로디를 찾는 자일 것이다. 예언적인 ‘미래를’찾는다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는 낙서를 속에 있다. 우리는 이미 미래를 ‘보았다’. 현재와 구별할 수 없을 만큼의 미시적인 차이 속에서.
VIDEO & MESSAGE _ Mok Jinwoo (목진우. 사진-영상)
전시의 최초기획과 전시명은 목진우가 수집한 텍스트, 'I HAVE SEEN THE FUTURE‘에서 출발한다. 목진우는 여행을 하며 촬영하고 수집해온 그래피티나 스티커아트의 텍스트에서 예언자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길거리의 낙서들처럼 출처 없는 무명의 목소리들은 불현 듯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메시지가 된다. 그는 본인의 경험에서 채집된 텍스트들을 재구성하여 볼드체의 텍스트로 재생산한다. 마치 예언하듯 강렬한 이미지의 텍스트들은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뚜렷한 실체가 없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PERFORMENCE FROM _ Seo Youngjoo (서영주, 퍼포먼스)
서영주는 ‘미래’를 모든 회귀하는 시간들의 미시적인 차이에서 발견한다. 직선으로 쓰여진 ‘나는 미래를 보았다’를 마치 둥글게 구부리듯, ‘나는-미래를/ 미래를-보았다/ 보았다-나는’으로 회귀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꼬리를 잇는 3개의 주제에 성경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를 더해 이미지-퍼포먼스로 풀어냈다.
1. 나는 미래가 되기 위해 창조물인 태아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에서 분열되고 분열을 통해 다시 하나가 된 것이다.
2. 회개하여 미래를 원하던 자들은 옷을 찢고 검은 재를 뒤집어씀으로써 다시 태어났다.
3. 나는 보았다고 광야에서 외친다. 그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힘을 가질 것이다.
SOUND FROM _ Kim Sungbae (김성배, 더블베이스-사운드)
김성배는 미래를 본다는 것을 흩어진 파편의 시간들 속에서 주관적 시간의 이미지를 찾아가는 행위로 해석한다. 그는 아티스트 해오(HEO)의 전자음이 만들어내는 노이즈 속에서 더블베이스 즉흥연주로 불가능성을 넘는 멜로디를 찾아나간다.
DIRECTING FROM _ Yeom Jihee (염지희, 기획-연출-미술)
염지희는 사진-영상, 사운드, 퍼포먼스의 협업을 통해 ‘현재 속의 미래’, 미래에 타임라인을 구축하는 시도를 한다. 제목인 ‘나는/ 미래를/ 보았다’를 분절하여 미래를 보는 ‘나’ 누구이고, 보이는 ‘미래’는 무엇이며, 미래를 어떻게 ‘보고’, ‘보았다’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인가를 질문한다. 이로써 실체 없는 ‘미래’를 ‘현재’로 불러와 증언하는 이 문장을 통해 가시화된 미래와 가능성을 묻는다.
참여작가들에게 ‘나는 미래를 보았다’라는 테마만 제시했을뿐, 본인이 표현해야 만하는 미래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다른 참여작가와의 간섭도 최소화하였으며, 개별성을 구축하고 그저 하나의 장소에 모일 수 있도록 하였다. 발표장소는 퍼포머의 무대이자, 상영관이며, 공연장이 될 수 있도록 바닥을 정리할 뿐이었다. 다만 거울이 있는 공간의 특징을 활용하여 영상이 거울에 반사되어 반대편 벽에 비춰지고, 거울에 투영된 이미지와 실체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추가적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퍼포머들은 염지희의 콜라주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이미지)에서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냈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동작들을 구성했다. (얼굴을 감춘 사람, 다리, 팔등 신체의 일부만 드러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 머리를 쳐박은 동물, 검은 물을 바라보는 사람)
공연당일 즉흥성을 기반으로 각각의 장르가 합을 이루도록 하였고 공연을 통해 다른 작가의 이야기를 체감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고 말한 것은 없었다. 각자 다른 사람의 미래를 바탕으로 하여 나의 미래를 이야기해야했다.
객석은 두 개로 나뉘어졌고, 관객은 두 개 이상의 화면-사운드-퍼포먼스를 관람해야했다. 동시에 연주되는 결이 다른 사운드가 부딪히거나 멜로디를 만들어지듯, 두 명의 퍼모머는 두 개의 미래가 되어 함께 혹은 다르게 태어나, 뒤엉켜 만나고 다시 분리되어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양한 채널의 화면은 각기 다른 이미지를 상영하면서 퍼포머의 움직임에 따라 왜곡되거나 퍼포머의 그림자로 지워졌다.
관객들은 본인이 착석한 위치나 시선의 선택에 따라 모두 다른 이미지와 이야기를 포착해야했다. 벽면의 거울로 인해 반전된 이미지나 심지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했다.
염지희는 목진우의 낙서사진들, 텍스트 영상 속에 몇몇 이미지들을 삽입하였다. 출처가 있거나 본인이 촬영한 낮은 화소의 사진들을 확대한 것들이다. 출처가 있는 이미지는 거의 그 출처를 찾을 수 없고, 일상 속에서 촬영된 사진들은 본래 그 사진이 갖는 시간과 공간을 잃었다. 낮은 화소의 확대된 이미지들은 고해상도의 빔프로젝터로 상영되어 회화적인 텍스쳐만 남은 이미지들이 되었다. 이미지들 중에서는 달의 실제 뒤편과 달의 뒤편을 염사한 것이 있다. 이것은 달의 뒤편이 촬영되기 전에 일본의 초능력자가 염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초능력자의 생각이 인화지에 남겨진 것이다. 달의 뒤편이 드러나기 전까지 초능력자들의 커다란 이슈는 달의 뒤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지의 영역을 주관적인 시각으로 구축하여 그리는 것. 그것이 미래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보았다. 우리 속에 미지로 남아있는 수많은 ‘나’는 어떤 미래를 보았을까.
5.
달의 뒤편으로부터,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우리가 달의 뒤편을 보기 전까지, 달의 뒤편은 신비로운 미지의 영역이었으며, 초능력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였다. 초능력자들은 달의 뒤편을 염사하며 수많은 달의 뒷편을 만들어냈다. (실제 달의 뒤편은 염사된 뒤편보다 초라하기 그지없다.)
달의 뒤편이 드러나버린 지금, 우리는 매번 새로운 미지의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미지의 영역은 어디일까. 우주의 끝? 다른 차원과 시간?
하지만 또 다른 미지의 영역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것은 ‘얼굴’이 아닐까. 달의 뒤편처럼, 인간은 거울이 없을 때까지 자신의 얼굴을 알 수 없었다. 마치 염사된 달의 뒤편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에 얼굴을 비추며 어렴풋하게 자신의 얼굴을 가늠할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거울에 비추며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여긴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좌우가 반전된 것으로, 엄밀히는 나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눈은 여전히 바깥을 향하기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의 얼굴은 알 수 없다. 절대적으로 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은 절대적으로 가까운 나의 얼굴이다.
어쩌면 수세기에 거쳐 반복되는 미지의 이야기는 얼굴찾기-나의 삶(얼굴)을 삶(얼굴)의 형태로 만들기-일지도 모른다. 미지의 영역은 멀지않은 곳-나와 아주 가까운-눈의 뒤편에 자리한 그림자-나의 얼굴-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