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m Ji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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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김남수(미술평론가)_무[案無]의 연극성, 연극적 공간,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몸_2018 2019-09-28

 

[案無]의 연극성, 연극적 공간,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몸

 

 

김남수(미술평론가)

 

 

 

 

 

#1. “물질이란 얼마간은 자연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여 삶에 언제나 색다른 열정을 주지만 곧 그것은 자신의 온 몸 속에 혼란을 일으킨다.”

(마리아복음서 제4장 중에서)

 

#2. “그렇다면 사유는 어디서부터 다시금 외계로 향하는 경로를 개척할 수 있을까?”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85

 

 

 

염지희 작가의 개인전 <오크 에스트 에님 코르푸스 메움(이것이 진정 나의 몸이니)>(2016, 행화탕) 관람은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배우 없는 연극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종의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이 극장이라는 공간은 주어진 장소에 디자인되어 있는 상관관계의 휴먼드라마가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염지희 작가는 오히려 그러한 상관관계적 원환에서 떠나고자 그 극장 공간을 열리도록 장치한 것 같습니다. 연극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민주주의의 학습장 같은 것이었고, 여전히 공동체의 유아론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장르입니다. 염지희 작가는 그러한 유아론적 코기토에서 일단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동시에 관람객들에게 그러한 체험적이며 재현적인 세계 -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며, 그 앎을 확인하는 것처럼 되어 있는 세계 -를 인지하고 그 상호주관적 그물망을 찢고 빠져나가기를 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우묵한 공간은마치 동굴처럼, 새로운 삶의 서블라임한 상태를 권하는 동굴처럼 장치화되어 있었습니다.

배우 없는 연극의 공간은 이처럼 움직이는 깊이처럼 안쪽으로 향하지만, 교묘하게 동선화되어 있어서 높이의 영역으로 상승하게 됩니다. 마치 어떤 산정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산정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다른 산정을 찾아서 끊임없이 능선을 걷는 것, 걷기의 예술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걷기함수의 해로서 걸음의 단위, 들숨과 날숨의 비율, 공간적 분절 그리고 동굴 속처럼 보이지만 실은 외계로 향하는 경로 등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디자인된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이 동선화된 공간, 빔의 즉자적계시의 공간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안무[案無]라는 고안된 개념은 원환적인 반복을 거듭하는 공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작업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어떤 변이를 경험하는 것이아니라 아예 표상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 이전의 사유로부터 견인해오는 작업입니다. 염지희 작가는 세계의 사물이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을 열어주는 퍼스펙티브보다는 우리가 어떤 변명으로도 무지한 그 무엇에 대 한 , 불가능한 열림의 가능성의 중심[medium]에 대한 퍼스펙티브를 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퍼스펙티브에는 기능적인 담화, 어떻게 그것이 성립되는가를 빙 둘러서 말하기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용은 언급하는 순간, 그 자체로 상관관계의 원환 속에 다시 묶이고 수렴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상[] -- 여기서 상[]서로라는 뜻과이미지라는 뜻을 함께 갖습니다 - 을 만들지 말라.”

관람객인 저의 눈 앞에 놓여진 작품들은 그러한 불가능하고 낯선 세계의 구성적인 분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작품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외계로 빠져 달아나려는, 그러나 온전히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새로운 의식의 분쟁과 갈등이 싹트도록 촉발하는 어떤 매개물이나 신성한 사물처럼 여겨졌습니다. 물질이란 염지희 작가에게 마리아복음에서 언급되듯 "자연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혹은 역행하는 생명성의매체지만, 그의 회화 작업은 그 물질적 생명 상태가 "온 몸에 혼란을 일으키고" 다른 상태들과 얽히거나 변신하는 단계로 다가왔습니다. 이 신화적 변신담은 까마귀 같은 새들, 식물적인 영험의 잔여를 풍기는 사슴뿔, 생명의 다른 사물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 인간 신체 등등이 분자적 결합이나 균열의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었습니다. 주요한 작품 중에 세 개의 거울처럼 살짝 각도가 형성되어 있는 - 무한의 이미지 분사가 끝없이 일어나는 - 프레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바탕이 되는 평면이 너울거리고 있습니다. 마치 벽이 울듯이 커브가 잡힌 평면의 타블로 위에 많은 분열과 조합의 변신담이 천변만화 하게 하는 삼면경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울고 있는 평면은 '숨은 차원'(리사 랜들)을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변신의 모티브는 그 '숨은 차원'에 힘입어서 다른 생명종과의 기괴하고 동시에 익숙한, 그러면서도 작가 스스로의 충동적 에너지를 실은 타입으로 변주됩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변신하는 그 몸체들이 형이상학적인 단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몸체로서 윤곽지어진 위상학적 조건을 거울, 평면 프레임, 파괴와 균열 그리고 결합, 식물적 충동같은 에너지의 조건이 변화시킨다고 할까요. -개체적인 단계, 개체화되어 있지만 그 이전의 잠재적인 단계에서 다른 생명과의 조우를 전면적으로 겪는다고 할까요. 우묵한 동굴 속에서 삼칠일을 보내면, 동물의 영혼이 신격으로 변한다고 하듯이. 제가 생각컨대, '그리피니즘'은 그런 변신조합이 이루어진 그리핀같은 생명의 전-개체적 결합술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닐까 합니다. 염지희 작가의 변신담에는 모든 사물들에 생명의 징후가 있다는 범심론이 느껴집니다. 이렇듯 언뜻 요약하거나 언급하기 곤란할 만큼 그 생명적 사물들 - 역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 은 그 동굴 같은 공간의 배우 없는 연극속에 반쯤 녹아들어 있었고, 마치 북미인디언의 다발지어진 한 단어의 언어 - 한 단어가 기나긴 뜻의 문장을 뜻하는 언어 -처럼 우리에게 무언의 말을 한 무데기 건네고 있었습니다. 무언의 말로서 '그리피니즘' 현상. 아마도 그 행화탕이란 공간이 가진 공간적 권능과 상관없이 그 덩어리진 말의 건넴은 염지희 작가가 강하게 주박시켜놓은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의 수행적인 타입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음의 명령문은 어떤가요.

 

나를 만지지 마라.”(부활한 예수)

 

어쩌면 염지희 작가는 이 명령적이며 실효적인 발언이 갖는 의미망에 주목하면서도 그 의미망을 펼쳐서 일종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수행문은 낭시 같은 철학자에 의해서 어떤 맥락과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지, 안무[按舞]적 전략이 있는 몸의 새로운 제시인지 밝혀집니다. 가령, “만지면 안 되는 것, 그것은 부활한 몸이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만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져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몸은 만질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의 몸이 공기화된 육체, 혹은 비물질적인 몸, 유령의 몸, 환영으로서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텍스트는 이 몸이 만져질 수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혹은 차라리, 이 몸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접촉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31-32) 이에 대해서는 염지희 작가는어쩌면 비어있는 그 자체에 대한 확신만이 남아있다고 정리합니다. ‘비어있는 몸이란 무엇인가요.

여기서 우선 말해야 할 대목은 인간의 몸에 주어진조건입니다. 인간의 몸은 태어날 때부터 이 세계로부터 일정한 고유공간을 할양받습니다. 몸피가 커지면서 그 고유공간은 늘어나지만, 이 공간에 대한 점유력은 그대로 있습니다. 이 고유공간이 사라지는 것은 화장할 때뿐입니다. 엠페도클레스의 에트나 화산 다이빙, 헤라클레스의 산 채로 화장 같은 신화적 퍼포먼스는 이 고유공간의 사실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실성은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회적이지만 죽음과 결부되어 있어서 실존하지 않습니다. 초월적이며 현상학적이기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상관관계적 구조에 묶이지 않은 채, ‘비어있음자체로 존립하는 영역을 격렬하게 드러낸다고 할까요. 염지희 작가가 말하는비어있는 몸떠도는 그림자만이 남은 동시에진리가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끊임없이 갈구하는대상일까요. 주체일까요. 의식 없는 비인칭의 흔적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크 에스트 에님 코르푸스 메움> 전시는 그 자체가비어있는 몸처럼 기능하는 극장이자 연극이니까요. 안으로 걸음을 떼어놓을수록 빈 동굴처럼 우묵해지는 기분 속에서 우리는 작품이라는 사물과의 주관적 관계 안에 있는 감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감각과의 차단이 일어납니다. 마치 마리아에게나를 만지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럼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염지희 작가의 이 작품들은 놀랍게도 빵과 포도주처럼 다시 한번 몸의 그것, 세계의 몸처럼 접경하는 살의 그것으로서 동시적으로 노출됩니다. 만지지 말라는 급작스런 금지적 명령은 다가오라는, 점근선적으로 다가와서 변성하라! -- Alter your consciousness!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개체화된 단계에 있으라. 일종의 문지방[limen]처럼비어있는 몸은 하나의 매개가 됩니다. 접촉이란 국면이 바뀝니다. 만짐과만져짐, 봄과 보여짐이라는 소위 메를로-퐁티식의 과의 접촉이 아니라 만짐을 통한 진리가여기에 있다라는 확신의 불가능성과 함께 그 만질 수 없음의 조건 때문에 더욱 강렬해지는 갈망 사이에서 분리와 접속으로. (여기에 대해서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연극의 역사는실체적 분리보다는변성의식[altered states]을 통한 결합이 우세했습니다. 아르토라는 절대정신은 물질적 신체의 결합술 없이는 작동할 수 없었습니다.

염지희 작가의 연극은 전유하지 않고 증언하는 연극, 일종의 마리아 연극을 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마치불립문자처럼 나머지 사도들에게 달려와서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달했고, 그 전달 행위는 지극히 마리아-적인 방식의 언술로 이루어집니다. 울고 있는 평면 위에 놓여진 삼면경 같은 이야기가마리아복음서입니다. 이 복음의 저자는비어있는 몸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가 모두 다릅니다. 예수의 부활된 몸을 마주하고 요한과 도마와 마리아가 보여준 각각의 역할은 염지희 작가에게 중요합니다. 요한은 "보지 않고 믿는" 그노시스트라면, 도마는 "만지고서도 의심하는" 실증주의자일까요. 도마복음서는 그 실증성이 얼마나 중요한 도약이 일어나는 플랫폼인가를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경우는--? "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수행성에 직면한 사람입니다. 접경하고 분쟁하는 몸과의 터치가 금해지는, 그 고유공간의 고유성을 내버려두는 사람. 그러나 이 전시는 이 세명의 다중적 관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마치 이 전시로부터다양한 시선들이 교차하는 것을 바랐습니다”(염지희 작가)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 통상적인 의도는 이 경우에 맥락이 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지금 여기로부터, 우리의 내부적인 것, 상관관계의 쳇바퀴 같은 것, 철학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로 보였습니다. 절대적 외부를 상상하기라고 할까요.

사슴뿔을 만나고, 부러진 나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의 몸이 변형되는 것을 접하고, 걸음을 옮겨놓자 네온사인이 어떤 메시지를 마치 모래 속 의 낙뢰 흔적처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연극은 걸음을 떼어놓으면서 어떤 모티브의 반복, 반복적인 몇 가지 모티브가 어떻게 바리에이션을 일으키는가를 보게 되지만, 그러한 푸가적인 반복에서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그보다는 사물로부터, 상황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부분과 전체 사이의 모종의 수축과 알 수없는 확장 - 마치 무한처럼 - 이 들숨날숨처럼 작동하는 것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이를 즉자적 계시라고 할까요. 해석적인 틀로부터 자유로워진, 요약하거나 관념적인 언어의 스케치를 받는 것이 곤란해지는 연극처럼, 실제로 연극이 되듯이.

낭시의 <코르푸스>는 인간의 몸에 관한 책이지만, 인간의 몸에 대한 책이 아니기도 합니다. 이 책은 과도하며, 형이상학적입니다. 염지희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몸의 가능세계에 관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골칫덩어리입니다. 동시에 시선의 다양한 전개에 효모처럼 개입할 수 있습니다. 염지희 작가가 말하는시선의 다양성이란 자유로워진 연극성의 전시가 어떤 공간적 전회를 하고 있는가에 주목하지만, 그 주목의 끝에 응결되는 해석적 틀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계속 다른 생각, 헛생각 그리고 우발성의 생각을 개방할 수 있는가와 관련됩니다. 즉 이 전시는 사유의 가능성에 관한 작가의 실험이 깃들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즉자적 계시는 어떤 작품들의 질서가 보여주는 흐름을 결코 인간적으로 경험하는 선에 머무르지 않고,그렇다고 담론적 언어로 그 흐름의 법칙을 표상할 수 없는 단계입니다. 메이야수에 따르면, 그냥 사실적인 단계입니다. 사실성의 함축이 충만한 세계에서 염지희 작가의 개별 작품들, 아니 전시 단계의 세계관이 경이적입니다. 형이상학적 잔해물을 사용하여 지은 이 연극은 인간이 인간적인 체험의 여러 영역, 상관관계의 축약된 통념 영역, 미술적인 것의 경계 영역같은 동시대 미술의 여러 촉수뻗기와는 결이 다른 진행입니다. 독자적인 행간이 돋보입니다. 개념적인 오늬 - 화살 끝에 오목한 부분 -를 잘 만들어서 다른 오늬들과 함께 결합하는 괄호[ ]의 연극이기도 합니다. 이 오늬에 걸려서 삿대로부터 날아가는 화살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요.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염지희 작가의 가까운 미래가. 그러나 이에 대한 이야기는 미래의 몫으로 남겨둬야 하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작업의 분석은 좀더 면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숙제라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3. 잠깐씩 밝아졌다가 잠깐씩 그대로였으므로 볼 수 있었다

 

비 내리는 날 첨탑이 벼락을 끓여들이는 광경을. 그때 끝이 저물어버린 시간과 시간이 내색하는 배경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계속되는 끝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닿기 전과 닫은 흔적이 만나서 뚫리게 되는, 이를테면 조금만 어긋나도 달아나버리는 것 그래서 모든게 드러나는 순간


첨탑과 벼락의 끝이 궤적을 거둬들이는 중이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곳, 그러나 자꾸 알고 싶은 곳, 있던데가 없는데로 돌아와 남겨진 순서로 완성되기 시작하는

 

그 끝이 잠깐씩 보였다가 잠깐씩 머리속을 지나갔다

 

나는 멈추었는데도 멈추지 못한 사람들 속에 서 있었다 아무도 말걸지 않고 누군도 알 수 없는 끝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먹먹하게

 

 

_정영효, 단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