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m Ji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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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홍경한(미술평론가)_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_2015 2019-09-23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

 

 

홍경한(미술평론가)

 

 

 

 

1.

 

인간이 표현의 방법을 터득한 이후 줄곧 되물음 했던 것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ego)’에 대한 탐미였다. 나를 알아가기 위한 과정은 인간이 현실을 살아가는 한 사라지지 않을 영원성의 축이며, 무수히 억압하고 옥죄는 현실적인 것들과 적당히 유지해야할 관계, 변화하려는 욕구에 대한 욕망, 작품에 대한 실험적인 시도의 총체라 해도 그르지 않다.

 

그렇다면 나를 포괄하는 존재란 무엇에 의해 증명되며, 어떤 조타에 의해 유속을 달리하곤 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그것이 실존과 무관한 것은 아니요, 시야에 잔상이 맺는다하여 그것이 반드시 존재성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건 의 사유 속에서만이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을 뿐이다. 즉 사유하는 그 순간만이 나의 존재를 증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선 염지희의 작업도 동일한 맥락을 따른다.

 

사실 내 속의 모든 것을 끄집어낸다는 행위적인 측면에서 라는 대명사는 곧 사유와 등치를 이룬다. 시각예술에선 사유가 완성될 때 비로소 가시적 양태, 다시 말해 형상이 수반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 속 형상과 개념은 와 동시에 수용되며, 이는 염지희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초가 된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 사유의 측면과 사건의 관점이 교차되고, 실재와 언어가 공존한다. 한편으론 각각의 역할에 충실한 재현성을 띠는 누군가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서성댄다. 그것들은 분열된 내적, 비판적 타자로써 중립적-중성적인 태도로 접근하거나 존재에 대한 시선이라는 일관된 주제 아래 화면을 배회하는 유형학적 모습을 드러내며 콜라주로 인한 실체적 허구-구성적 번안에 머물기에 건조하고 차가운 외상(外像)의 언저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흔적들에는 삶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온기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어느 정도 간극을 유지한 채 염지희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그의 예술을 구체화하는 여러 알고리즘(algorithm)은 히스테리, 불안, 그로데스크, 허무, 죽음, 두려움 등이다. 괴팍한 모습을 한 등장인물들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히치콕의 <>나 이브 끌랭의 퍼포먼스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다소 염세적이기까지 하다. 일례로 그의 그림에 자주 모습을 비추는 사슴과 같은 연약한 초식동물들은 작가 내면에 드리운 나약함과 어두움을 가리킨다. 한 겨울에 서 있는 것 마냥 앙상한 나무들은 나에 대한 나 자신의 투영이며, 넓은 여백 안에 자릴 잡고 있는 질서 속 무질서는 불안을 상기케 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특히 <복합적 판타지-1(complex fantasy-1)>(2010)을 비롯해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그림에서 자주 출몰하는 까마귀는 불안감의 소환이자 기시적 단초로 묘사된다. 물론 동물들 못지않게 주목을 끄는 여러 인물들은 나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찢어져 나뉘거나 갈라짐을 상징하는 언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다분히 호환적이며 상호적, 유기적이다. 흡사 염지희 감독주관적 다큐멘터리로의 확장을 도모하듯 서로 간 낮고도 진득하게 호흡하면서 객관적 기록(사실의 나열)을 넘어 그의 예술언어를 생성시키는 주요한 분동(分銅)으로 자리한다. 당연히 그 분동의 무게는 나를 중심으로 한 무게-실존에 대한 끝없는 확인에 있으며, 그에게 그림은 곧 하나의 현실이자 좌절과 절망, 불측지연의 조마조마함과 생의 의미가 교차하는 복잡다단한 무대이다.

 

 

 

 

2.

 

작가는 이 불완전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무대에서 자기 내부에 똬리 튼 절망과 히스테리를 극복하기 위한 진실한 자기성찰을 투영한다. 마치 일기마냥 일련의 전개를 통해 치유의 문제로 다가선다. 이는 에 의해 촉발되어 우리의 해석을 담보하고, 그 해석의 자유로움으로 회귀하는 수순을 밟으며, 길고 긴 시간의 터널을 해체해 처음으로 귀환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이를 비인위적 모놀로그(Monologue)라고 명명하는 게 적합하다고 본다.

 

비인위적 모놀로그(Monologue). 작가는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기까지 생의 주체로써의 심적 유재(遺在)를 부여잡은 채 새로운 조형언어를 만들고 있다. 앞서 거론한 히스테리나 불안과 같은 여러 키워드는 은유적인 동시에 다중적 의미를 내포하며, 작품이 담고 있는 작가 개인의 사상과 철학이 어떻게 동시대와 유기적인 관련성을 지니면서 사회와 역사 속에서 발현되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증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증표의 첫 번째 발화가 색()이다.

 

염지희는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사물의 밝고 어두움이나 빨강, 파랑, 노랑 따위의 물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색의 개념에 충실한 편이 아니다. 굳이 색이라면 무채색 위주에 머문다. 그에게 색은 일정한 구조의 구성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고, 나아가 색 자체가 본래적으로 구조를 함축한다. 또한 그에게 색은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내지 않지만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추상적인 암호이다. 넓은 공간, 건조한 색을 통해 비극적 상황과 불안감, 두려움과 같은 주제들을 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표현상 콜라주방식도 그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염지희는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빠른 작업을 위해 연필과 콩테를 주로 사용하며, 패브릭이나 종이, 캔버스 내 상주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을 콜라주로 처리한다. 그가 지금은 잘 활용되지 않는 콜라주를 표현 방식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 형상을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직조하면서 이야기를 꾸미려는 의도에 따른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들은 다양한 이야기, 내레이션을 느낄 수 있고 굉장히 다변적이다. 어느 한 가지 정답만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기에 다층적 결과마저 기대되는 흥미로움을 안고 있다.

 

새로움에 관한 또 하나는 해석의 여유로움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동시상영을 넘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이 한꺼번에 상영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의 시()를 인용한 작품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2015)처럼 화면 중앙을 중심으로 확장되는 구성의 작품도 많으나, <오필리아의 체스보드(Ophelia's chess board)>(2012)에서마냥 복잡하고 나열적인 구성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작품들을 보면 관람객의 다수는 해석이 모호한, 느려지게 하는 장면들 탓에 혼란을 느끼는 반면 되레 이 지점에서 해석은 빛을 발한다. 이를 현상학(phenomenology)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들에선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요한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t)가 주창한 본체의 현상을 연구하는 수준에서 작업의 연속성이 있음을 읽는다. 형식면에서는 주관적 구성주의를 통한 객관으로의 전향(轉向)’을 무의식 아래 의도하고 있음도 발견한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에선 선험적 현상학, 다시 말해 인식론적 시야에서 의식과 대상과의 관계를 넘어선, ‘자아의 의식이라는 좁은 범위의 프레임에서 탈피해 물질과 생명의 원형적 질서를 탐미하고 존재론적 시야로의 스펙트럼과 삶-배경, 기억-환류 등을 염두에 둔 인간과 사회, 나와 세계라는 형이상학적 존재의 구조, 직접적으론 현존의 논리를 읊는 과정이 강하게 엿보인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그의 작업을 정의하는 핵심이라 여긴다.

 

 

 

 

3.

 

오늘날 작가 염지희의 작품들은 단순한 재현(再現)을 지나 하나의 관념적 공간, 공감 가능한 인식공간으로의 전환적 매개(媒介)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느 면에선 단순한 정지가 아닌 풍부한 상상력을 동반하는 도상학적 개념을 지니거나, 입체적 알고리즘을 형성하는 분자적 관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기까진 예술에 어느 정도 식견을 가진 이라면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헌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다루는 소재들이 아주 정적으로, 내면에서 층위로 승화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 동물과 콜라주 행위 인물을 비롯한 기하학적 도상 등, 다양한 상징체가 부유하지만 내적 상태를 투각해 자신만의 언어를 창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흡사 작은 퍼즐들이 집합을 이뤄내듯 가시적 관점에서 볼 때 파편적인, 그리고 그 표면에 부유하는 표현형식의 어울림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그 속엔 불완전한 속성을 지닌 대상(그것이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어떤 특별한 경험을 기초로 한 우리일 수도 있다.)의 기저에 놓인 상향적 푼크툼(punctum)적 요소들이 나지막이 들어서 있다. 특히 쉬르리얼에 가까운 듯하면서도 낭만적인 성격마저 엿보이는 조형성은 위에서 언급한 상징체들과 교합하며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달리 말해 염지희의 언어이며 때론 절망적 충동에 가까운 은유적 실체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들은 형식적인 부분에 많은 눈길을 할애 받으나 자유로운 타자의 상상이 이입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에 가장 중요한 건 상황(situation)’이다. 우리가 그의 여러 연작에서 우선적으로 인지 가능한 것은 정적이고 가끔은 지나치게 고요하여 역동성과는 거리를 두는, 즉 비극의 가장 감동적인 구성요소의 하나인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와는 다소 다른 연극적 상황이라는 것이다.(필자는 이를 순간적 지연의 연속성이라 부른다.)

 

이는 정지된 듯 순간적 지연에 몰입된 인물들, 스냅처럼 멈춰서 있는 경관들, 화면 곳곳에 도포되어 있는 인물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상황에서 작가 내면에 놓인 피안의 틈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엔 일정한 흐름이 깃들어 있다. 읽기 쉽지 않음이 사실이나 느린 유속의 순환이 놓여 있고, 작가적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그것의 정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잃어버린 사유요, 내면에 투각(透刻)되어 빚어진 삶의 단상들 혹은 존재론적 고찰, 그 자체이다.

 

염지희의 작품들이 특별한 색깔을 낼 수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인간 정신작용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명징하게 깨달을 수 없지만(나조차도 그와의 대화를 거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갔거나 일부를 전부인 냥 예단했을 것이 자명하다. 작가는 그의 모든 그림 속 장치들을 교란이라고 칭하는데 필자도 동의한다.) 흥미롭게도 이것이 곧 그의 작품들을 그 이상의 매체로 끌어 올리는 고유한 철학적 근간이 됨은 부정하기 어렵다.

 

설사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몸으로 느끼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정도의 여백은 제공한다. 조용하면서도 나지막한, 그러나 내면의 울림이 작지 않은 일종의 공명을 전달한다. 아무 생각 없이 다가서 마주할 지라도 그의 작업 속엔 그 만의 일렁임이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 커다란 충격을 준다거나 시각적 강렬함은 나타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정신적, 심리적 갈등으로 인한 정신신경증으로부터 빚어진 특유의 파동을 감지하는 것, 이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 공명을 언급하는 이유로 아쉬움이 없다.

 

어쩌면 그건 작가적 삶을 반추하고 현실을 포갠, 실재자(實在者)로써 겪어야하는 고독하고 힘든 여정을 보다 진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며, 작업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번뇌와 불투명한 이중고에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인생의 여정과 애환이 처마 아래 어둠처럼 깃들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원리와 원인에 대한 고찰이 즉석에서 생성되는 흑연의 세세한 스침마냥 마음 속 생채기, 뚜렷한 대상을 매개로 막연하거나 미완성 상태로 남은 감정에 형을 부여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지희의 작품은 개인사와 사회사가 맞물려 있기에 유독 시선을 끈다. 그 끝이 언젠가 비워지고 또 비워져 텅 빈 그릇만이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일 수도, 존재자가 존재자인 한에서 갖는 공통된 존재는 은폐되고 존재에의 물음은 잊히는 것에 대한 공명의 수단으로 예술일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건 그의 모든 표현은 나와 관계없는 듯싶지만 결국 나와 관계 깊은 곳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이요, 그것은 때로 관조적이고 망루에 선 듯한 여운도 있지만 자신이 하나의 사변적 시간과 물리적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인색하지 않음으로써 변화하는 어떤 촉매에 능동적으로 다가서 발화와 산출을 거듭하며 파국을 향해 줄달음치는 내적 상황, 우리 내면의 깊은 무언가에 등을 돌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가 만들어낸 화면은 타자와 화자 간 계층 없는 오감이 교차하는 장소이자, 실상에 존재하는 자신을 비롯한 안식으로서의 공간이며 연필과 콜라주로 응집한 다양한 흔적들, 이야기들은 작가 마음의 대리로 자리한다. 그곳에서 우린 지각하는 인간만이 깨달을 수 있는 관념과 이성, 판단과 가치관을 함축한 사유라는 대하를 만나고, 늘 되묻고 부딪히는 자문의 틀에 갇힌 우리네 마음을 비시와 같은 인간 삶의 여정에 이입시킨 채 욕망과 욕구를 비롯한 다양한 현실적인 것들, 이상화되곤 해도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조건들과 조우한다.

 

작가는 이를 엉뚱한 인물들과 낯설고도 친숙한 풍경이라는 상징을 통해 역설적으로 전환시켜 놓고 있다. 비록 강요는 하지 않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약간의 주지는 가능한 서사를 함유하고 있으며 싫든 좋든 삶의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번뇌와 불투명한 고뇌에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인간들의 애환이 처마 아래 어둠처럼 깃들어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 속 내레이션은 작가의 것이지만 실상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사연에 얽힌 정신적 외상, 죽음으로써의 탄생, 날카로운 고통이 되곤 하는 새벽의 기상, 잠깐의 행복과 돌아갈 수 없는 깨어남의 찌꺼기. 죽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도 자지 않고 귀머거리처럼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게 어디 특정인의 몫인가. 아니니까.

 

 

 

 

 


 

1)  작가는 이와 관련해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조차도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언어의 바깥을 경험할 수 없다는 허무함과 해석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듯한 죽음과도 같은 무기력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작품 전반에 풍기는 멜랑콜리한 분위기는 이러한 허무주의적인 상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2)  작가는 이와 관련해 본인의 작품 속에서 연극적인 무대는 교란되고 위태로우며 죽음이 도사리는 곳이다. 그곳에 콜라주 된 인물들은 죽음을 모르는 역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상징적인 죽음 앞에서 죽지도 살지도 않은 기괴한 그들의 모습처럼 우리는 분열과 해방의 모호한 경계에서 주체성의 상실과 획득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적인 형상의 항상성 안에서 주체성은 존재한다.”고 밝힌바 있다.

 

3)  이와 같은 필자의 시선은 작가의 발언에서 확실히 뒷받침된다. 그는 허무함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나의 모순적인 태도는 흑백의 콜라주와 복합적인 구성으로 시각 언어에 해석이 지연되는 지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4)  이는 기실 독일 관념론자인 게오르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언급한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해 후설(Edmund Husserl)의 선험적 현상학, 경험치 못한 세계로부터 이어진 순수의식의 범위로 확대되어 절대지(絶對知)에 이르기까지 의식 발전과정의 서술과 맞닿는다.

 

5)  푼크툼(punctum)은 철학자 롤랑바르트가 그의 마지막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한 것으로 확 찌르는 듯 강렬하게 다가오는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염지희의 작업에서의 푼크툼은 잔잔하다는 게 특징이다.

 

6)  체사레 파베세 공상의 끝일부 인용

 

7)  체사레 파베세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일부 인용